하루 살인사건 ━ 구원
하루 살인사건
はる
0.
제니의 꿈은 천문학자였다. 실제로 학자였던 친모의 영향이 컸다. 제니의 집엔 제니가 여섯 살이 된 후에야 드나들기가 허용된 방이 존재했다. 그곳엔 행성과 은하가 둥둥 떠다녔다. 제니의 모에게 일 순위인 것들을 한가득 모아둔 곳이었다. 그래서 제니가 아주 어렸을 땐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경기를 일으키며 막을 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는 육각형모형이나 세모모형. 또 늙은이의 주름 같은 것이 달라붙은 둥근 공들. 여섯 살 제니는 왜 그리도 이것들을 소중히 여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괴상한 것들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모에게 벅차오름을 느꼈다. 제니는 시간이 지난 후 친모의 생김새나 머리카락색은 잊어버렸지만 냄새는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녀에게선 구름이나 달, 하늘의 냄새가 났다. 그것들은 제니가 가까이 가보지도 만져보지도 않은 것들이지만 제니는 친모의 향기를 그렇게 기억했고 결코 잊지 않았다. 실제로 제니의 친모에게선 뭉실하고 둥실한 향기가 진동했는데 그것은 제니가 생각한 것과는 아예 다른 이유에서였다. 제니의 친모는 천문학자임과 동시에 마약중독자였다. 그리고 그 이유에서 직장을 버렸다. 점점 시각을 잃었고 후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수준이 됐다. 제니는 친모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모가 가진 역겨우리만큼 불투명한 세계를 동경한단 소리였다. 열렬히 열망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을 만큼이나. 제니는 컸다. 제니는 마약을 시작했다. 제니는 트랜스젠더가 됐다. 그리고 눈 내리는 춘설, 제니가 죽었다.
1.
태형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니를 만났다. 친모도 부도 아닌 제니. 제니는 아기와 전혀 가깝지 않은 사람이지만 신생아인 태형을 기꺼이 껴안아주었다. 자기 체온을 나눠줬다. 태형이 정확하게 그런 제니를 인식했을 때를 떠올려본다. 제니는 키가 컸고 엄청난 미인이었다. 언제나 화려했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것은 제니의 화장이나 입은 옷과 장신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일상적이지 못한 화려한 복장에 짙은 화장은 제니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었고 태형은 제니가 일하는 공간에서 함께 지냈다. 제니가 누구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일절 없었지만 어렸던 태형이 십대가 되고 이십 대가되면서 자연스레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제니는 트랜스젠더였고 그것이 직업이기도 했으며 우리의 보금자리는 제니의 직장근처 투 룸이었다.
태형은 말이 없다. 사실 말뿐만이 아닌 태형에겐 없는 것이 많았다. 제 나이보다 늦게 들어간 학교에선 그게 확실히 눈에 띄었다. 태형은 동급생이 당연하게 들고 다니는 신발가방이나 물병. 담임이 준비물로 적어준 열 두가지색 크레파스나 스케치북 따위가 없었다. 분명 말했다면 제니는 직접 사주진 않더라도 돈을 줬을 것이다. 어린애가 쥐기엔 거대한 오 만원 지폐를 몇 장이나. 하지만 태형은 제니에게 준비물이 적힌 알림장이나 담임의 차별 행위를 말한 적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이유가 없다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 너무 많은 부분에서 제니의 희생이 따르고 있었고 그것은 모두 태형이 갚아나가야 할 것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학교에선 자연스레 따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그 어린 나이부터 태형은 사람 눈치 보기를 습관으로 두게 됐다. 안 그래도 없던 말수가 학교를 다니고 부턴 더 없어지니 제니는 꼬박꼬박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고 타박했다. 물론 태형을 탓하는 말은 아니었다. 제니는 가벼운 말이라도 태형을 구박하거나 내팽겨 치지 않았다. 그저 태형이 너무 일찍이 알아버린 탓이었다. 늦게 배운 말은 또래 애들에 비해 턱없이 느렸는데 그것을 차근차근 들어줄 이는, 적어도 이 세상에선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만난 제니는 절대 태형의 친모가 될 리 없다. 그렇다고 친부도 아닐 것이다.
제니는 술만 마시면 유난스러울 정도로 야광별 스티커를 사들고 들어왔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매일 술에 취해있었는데 그렇다보니 점점 붙일 곳이 없어 처박힌 스티커만 오십 장이 넘었다. 태형이 그곳을 나오기 직전엔 지구본 하나를 들고 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태형도 꽤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 지구본을 뺑글뺑글 돌리면서 태형은 처음으로 입 안이 간지러웠다. 세상은 태형이 알고 있던 것들 보다 훨씬 넓었고 거대해서. 태형은 그 사실이 퍽 기뻤다. 이정도면 자신의 인생이나 상황이 꽤나 공상같이 느껴져서. 나 따위가 형태 없이 부유하는 것 즘은 괜찮게 느껴졌다.
아 입안이 간지러웠던 것은
‘제니 이 중에 가본 나라있어?’
‘뭐 홍콩은 자주 가는 편이지. 왜? 너도 가고 싶냐?’
‘저질.’
혹시 이 중 어딘가에 내 모부가 살아있긴 한 거냐고. 문득 묻고 싶어져서. 그러지 않았지만.
제니는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라고. 술 취해 잠이 들기 직전엔 꼭 그런 말을 했다. 거의 중얼거리는 수준으로. 때론 가지각색의 숫자가 난무하는 통장을 들이밀며 깔깔댈 때도 있었다. 이렇게나 모았으니 곧이라고 소리쳤으면서 태형이 스무살이 돼 그 집을 나올 때까지도 제니는 천문학자가 되지 못했다. 제때 닦아주지 않아 먼지 쌓인 지구본과 접착이 사라져 너덜대는 야광별 스티커. 태형은 우습게도 그것들이 이따금씩 그리웠다. 태형의 보금자리와 가까운 문방구 앞을 지나칠 때나 우연히 밤하늘을 올려다 본 순간엔 문득문득 제니의 술 취한 깔깔거림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
그날 태형은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날은 유독 새벽 내내 손님이 끊임없이 몰렸다. 그렇다보니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근무가 이어졌다. 정신없었지만 태형은 다음 달 통장에 쌓일 추가수당만 생각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가게를 나와 휴대폰을 켰는데 쏟아지는 부재중 목록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은 순간 태형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나치는 택시를 잡아탔을 땐 뇌가 멈춘 듯 멍했다. 출발과 동시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미터기를 보면서 오늘 추가근무를 해 다행이라고, 그런 생각도 했다. 장시간 히터가 틀려있었다는 듯 열 오른 택시 안에서 태형은 거의 반수면 상태로 시트에 기대있었다.
여보세요 한태현씨 보호자 맞으십니까? 그 전화는 낯선 열한자리 숫자만큼이나 태형이 알지 못하는 이름을 자꾸만 말했다. 한태현씨가…한태현씨는…한태현씨의… 나는 절대 누군가의 보호자일리 없는데. 하지만 그 단어를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한태현. 그 이름은 태형이 결코 알지 못했던 제니의 본명이었다.
머리 두피에서부터 신은 스니커즈까지 담배냄새에 절은 상태로 제니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다. 긴 시간 자게 된 제니의 얼굴은 평온했고 고요했다. 어느새 긴장하고 있던 태형의 맥이 풀릴 만큼이나. 원래도 하얀 피부이긴 했지만 눈 오는 산에서 조난돼서 그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새하얘보였다. 태형은 제니를 멍하니 봤다. 제니는 늘 늦은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태형이 일어나면 제니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잠들어있었다. 태형은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봤다. 그런 생각을 하다 구역질이 올라와 발등언저리부터 식은땀이 바짝 났다.
이리도 따스한 봄날인데. 겨울도 아닌 날에 하필이면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서 죽었다. 죽은 제니를 내려다보며 태형은 그때를 떠올렸다. 태형이 투 룸을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하고도 이년이 지난 어느 날, 제니는 태형이 좋아하지도 않는 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나타났다. 오기 전 몇 달에 한 번 주고받을까 말까 한 메시지를 통해 주소를 묻긴 했다. 화면 가득 둥둥 뜬 메시지는 별스러웠다. 왜 샀는지 모를 이모티콘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면서 태형은 단락하게 주소만 찍어 답을 보냈다. 손재주도 없으면서 제니는 음식하기를 좋아했었다. 아 제니가 하는 무말랭이 맛없는데. 그 후 제니는 곧장 들이닥쳤다. 답을 보낸 게 5시간 전이었는데 아침 해가 뜨자마자 반찬 통을 든 채 나타난 것이다. 몇 년을 연락도 없이 잘 살아놓고. 태형은 대수롭지 않게 문을 열어 제니를 맞았다.
‘나 결혼해.’
제니는 네모난 반찬 통 두 개를 바닥에 내려두며 산만하게 굴었다. 그러다 툭 던지듯 말했다. 결혼해. 그 말에 태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널 키웠지만 그래도 처녀잖니. 나도 시집가야지.’ 빨강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만지작대며 제니가 중얼댔다. 태형은 그와 비슷한 색의 양념이 덕지덕지 묻은 무말랭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고갤 들었을 때 제니는 처음 보는 얼굴로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여태껏 이리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얼굴로.
‘누군데?’
그래서 물었다. 귀찮았고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음에도.
‘일 년 전부터 매일같이 오던 손님. 내가 좋대. 나도 그 사람 좋고. 잘해줘. 근데 그 사람 아들이 둘이나 있어. 그래도 뭐 나 같은 애 예쁘다고 애지중지하는 거 보면 감동이기도 하고. 나야 고맙지.’
‘식 같은 건 하지 마. 늙어서 추해.’
‘지랄하네 나 아직도 존나 탱탱하거든? 야 근데 너는 애가 반찬을 해다 날랐는데 고맙다거나 맛있겠다란 말 한마디 없냐? 하여튼 싸가지가 존나게 없어요.’
익숙하게 쏟아지는 잔소리가 별스럽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제니는 별스러운 것 투성이였는데. 태형이 그런 제니에게 한 말은 고작 그거였다.
‘축하해. 노총각’
‘뒤질래?’
‘아 알았어. 노처녀.’
‘이게 근데!’
‘아니 근데 무말랭이 색이 왜이래? 또 술 먹고 만들었지? 제대로 한 거 맞아?’
제니는 금방 돌아갔다. 같이 밥 먹고 가. 태형이 던지듯 한 말에 그 사람과 데이트가 있다며 깔깔대던 모습. 그런 제니를 바라보며 이제 더 이상 천문학자는 되고 싶지 않은 거냐고. 또 그런 거라면 모두 다 놓고 이젠 그만 행복해지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태형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말 정도는 할 기회가 넘쳐흐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근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꼭 행복하라고, 그렇게 말해줄 걸 그랬다. 후에 이딴 후회를 하게 될 줄 알았다면. 말이라도 해줄걸. 태형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제니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가방 끈에 붙어있던 야광별 스티커하나를 떼어내 제니의 손등에 붙여주었다. 이젠 더 이상 반짝거림이 없는 스티커지만. 테두리가 삐뚤삐뚤한 싸구려 스티커지만. 이왕 가버린 거 별나라로 갔으면 좋겠어서. 지옥이든 천국이든 별을 타고 갔으면 좋겠어서. 태형은 잠든 제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을 벙긋댔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마지막이었다.
2.
마지막인 줄 알았던 제니와의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게 생각보다 길어져서 태형은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이어진 인연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에.
준비하던 고시를 무사히 치룬 날이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귀가한 태형은 그간 참았던 잠을 몽땅 잘 기세로 침대에 엎어졌다. 개수대인가 욕실인가 어딘가의 수도꼭지가 꽉 잠기지 않은 것인지 좁은 방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크게도 들렸다. 그 소리를 자장가삼아서 태형은 어느새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정말 죽은 듯이 잤다. 그러다 별안간 초인종이 울리는 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인상을 쓴 채로 일어났다가 금세 다시 잠에 들려했으나 현관문을 뻥뻥 차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뛰쳐나갔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태형은 단번에 굳어버렸다. 이곳에 서 있을 리 없는 이가 태형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는 제니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다. 서늘하기 그지없던, 쇠 냄새가 진동하던 방에서 잠든 제니를 바라보며 태형은 작별인사를 마쳤다. 또 올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랬고 온다 해도 제니는 이제 없을 테니까. 그리곤 금방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태형의 몸에 맞게 꺼져버린 매트리스나 높은 베개. 예약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보일러와 둘 중 하나가 고장 난 것이 분명한 수도꼭지의 물소리.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태형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제니가 저주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냈다. 어디서 싸가지 없게 멋대로 마지막이래? 마치 제니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가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가게 된 장례식장에선 제니의 동료들이 떠나가라 시끄럽게도 울고 있었다. 고성방가수준이었다. 태형은 정말 그곳에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했지만 이렇게 가버리면 역시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한 몸으로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 덩그러니 놓인 낡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습관처럼 눈을 감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땐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태형의 스니커즈 앞으로 흰 운동화가 보였다. 천천히 고갤 들자 초면의 남자가 태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 애였다.
‘전재우 아들이에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한태현 알죠?’
‘…제니’
‘네 그 사람 파트너였던 사람.’
스치듯 떠올랐다. ‘근데 그 사람 아들이 둘이나 있어.’ 태형은 그때서야 그 애와 눈을 마주쳤다. 오다가다 마주쳤을법한 익숙한 교복차림. 볕과 어울려진 맑은 피부. 쌍꺼풀진 커다란 눈과 높지만 뭉툭한 코. 꾹 다문 입술. 태형은 실례임을 알았지만 그 애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언젠가부터 제니의 메신저 프로필에 걸려있던 그 남자와 닮은 건가 싶어서.
‘산에서 죽었어요. 둘이 같이.’
몰랐다. 제니 홀로 외로이 죽어버린 줄 알았다.
‘아버지와 제니가 동거했다는 건 대부분 몰라요.’
태형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결혼한다고 했으면서. 태형은 어쩐지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죽은 사람은 언제나 치사하니까. 침묵밖에 할 수 없는 존재. 태형은 이 감정의 몫을 오래도록 지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여건이 부족했다. 사실 억울할 것도 없었다. 제니는 분명 행복하게 웃었었으니까.
태형은 지금 돌아가면 그간 실패했던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애의 담담한 미성을 듣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잠 못 잤어요?’
태형은 고갤 저었다. 숨기고 싶던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취한 행동이었다. 그 애는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그런 태형을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그게 끝이었다. 태형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 후는 당연히 없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지금 그 애가 태형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돼요?”
그때와 같은 삐딱한 얼굴로.
“전정국이에요.”
끝까지 안 물어볼 것 같아서. 그 말에 태형은 정곡에 찔렸다. 정국이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그 이름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태형의 주변이 자주 음소거되는 탓이 컸다. 제니는 어린애가 자야할 시간에 바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다닌 학교에서 이렇다 할 인연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후에 그 보금자리를 떠나고 나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태형이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대게 혼자 일을 해내야하는 것들이었고 그렇다보니 더욱 심해졌다. 아마 대인기피증은 아닐 것이다. 그저 사회성이 마이너스인 인간일 뿐.
정국은 그때와 달리 애 티를 조금 벗은 모습이었다. 우선 태형의 뇌리에 남은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고작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얼굴이나 보이는 곳곳의 뼈대가 굵어진 느낌이었다. 태형은 그게 또 신기해서 정국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용한 목소리로 이름을 알렸지만 정국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형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볼 것도 없는 좁은 방안을 두리번거릴 뿐.
“형 혼자 살아요?”
“보다시피”
정국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대답할 줄 몰랐다는 얼굴이다.
“그럼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때요?”
이젠 태형의 두 눈이 커졌다. 정국이 자신의 거처를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을 타이밍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엉뚱한 말이 나와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려던 말을 다 까먹어버렸다. 그때 정국이 덧붙였다.
“저 잘 못자서요. 가위눌리고 악몽 꾸고 그래요.”
마주친 두 눈이 빨갰다. 태형은 저 충혈 된 눈을 잘 알았다. 제니의 시체를 보고 난후에 태형의 두 눈이 딱 저랬다. 저 알바도 짤렸어요. 정국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곤 한숨을 푹 쉬었다. 태형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정국에겐 나쁘게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서슴없이 나타나 태형을 당황스럽게 만들거나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일삼는 사람인데. 너무 뻔뻔하게 들이대니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가끔씩은 와도 돼요?”
“집이 여기랑 가까워?”
뭐 대충요. 정국이 씩 웃었다. 그 얼굴에 태형은 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제니의 프로필사진에 담긴 얼굴을. 웃는 얼굴이 많이 닮았구나. 당연한 생각을 그렇게 했다.
“녹차 마실래?”
“언제쯤 주려나 했어요.”
정국이 킥킥댔다. 그리곤 기분 좋다는 듯 고갤 까딱까딱 움직거렸다. 그때 정국의 고동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머리통이 참 동그랗다, 얘는. 태형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를 스치듯 쓰다듬었다. 튀어나온 부분을 정리해준 편이 맞겠지만. 그리고 있으나 마나한 부엌으로 사라졌다. 태형이 직접 사둔 적 없지만 언제부턴가 선반에 놓여있던 녹차티백을 사용할 생각으로. 아마 제니가 사둔 것이겠지.
그런 태형이 사라지자마자 정국은 빠르게 자기 얼굴을 숨겼다. 얼굴이 터질 듯 타올랐다. 태형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아마 지금 정국이 거울을 본다면 잘 익은 토마토 하나가 서 있을게 분명했다. 고작 그 손길 한 번에.
3.
정국은 정말 자주 나타났다. 가끔 와도 되냐 물은 것이 어이없을 정도로 이틀에 한번 꼴로 들이닥쳤다. 한번은 태형이 새벽 내내 잠이 안와 밤을 샌 적이 있었다. 해가 뜨기 직전에 겨우 잠이 들어, 열 개나 맞춰둔 알람을 모두 듣지 못했다. 오후 아르바이트는 물론 해야 할 일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 날이었다. 그렇게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누군가가 태형의 몸을 격렬하게 흔드는 탓에 깜짝 눈을 떴고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정국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겁에 질린 얼굴로 정국은 태형의 어깨를 계속해서 흔들고 있었다. 양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태형은 태형대로 당황스러웠다.
‘너가 왜 여기…’
‘미쳤어요? 수면제 과다복용 뭐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막 잠에서 깨 목소리가 탁했다. 태형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나서야 엎어뒀던 휴대폰을 켰다. 그리고 보이는 화면에 깜짝 놀라 화들짝 몸을 일으켰지만 금세 주저앉았다. 정국은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태형을 꽉 잡아 일으켜주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해. 알바 짤렸겠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약 어디 있어요? 내가 다 갖다버릴 거예요. 내놔요.’
‘그런 거 없어.’
‘근데 이렇게 시체처럼 누워있어요? 나랑 병원가요. 그건 그거대로 걱정되니까.’
시체. 태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단어엔 달라붙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먼저 정국에게 들어야 할 답이 있었다.
‘넌 어떻게 들어왔는데?’
꾹 다문 입술에 인상 쓴 얼굴은 본래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정확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정국이 저런 얼굴로 있으니 마음이 안 좋았다. 마치 사과해야할 것 같아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밤에 잠을 좀 설쳤어. 원래는 안 그래. 그러다가 여섯시에 잠들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잔거야. 됐어?’
태형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태형은 그런 정국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당황한 듯 정국의 커다란 두 눈이 움직거리는 걸 보면서 태형은 혀를 찼다. 도대체 내가 왜, 지금 너랑. 분명 머리로는 그런 생각이 가득한데 마음은 자꾸 겉돌았다. 태형은 자신이 느려서 발 빠른 정국에게 휘둘리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하지만 그게 맞았다.
‘저번에 왔을 때 가져갔어요. 선반에 있던 키.’
‘와아…’
‘예비 키 같아서요. 형 없을 때 멋대로 들어오고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오늘 같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이 절도범아.’
‘결과적으론 제가 형 살린 거 맞잖아요.’
저가 말해놓고 민망한지 정국이 배시시 웃었다. 태형은 그 얄미운 얼굴을 노려보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모르겠다. 내가 자꾸 너에겐 약해지는 것 같아. 그런 말을 중얼대면서. 하지만 아쉽게도 정국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형 라면 먹을래요? 그렇게 물으며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기 때문에. 그리곤 정말 요리를 할 작정인지 도마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형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아 어두컴컴해진 세상엔 비행선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수천 개가 넘는 별이 떠 있었다. 달도 보였다. 태형은 정신없이 별과 달을 뒤 쫓았다. 검은 세상이 자꾸만 물결쳐서 쫓으면 쫓을수록 별과 달이 더 멀어졌다. 그게 아쉬워서 태형이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국이 나타나 태형의 손을 잡아주었다. 태형은 몽롱한 상태에서도 그게 안심이 돼 작게 웃었다. 정국이 다시 돌아왔을 땐 태형은 다시 잠들어있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불어버릴 라면을 차려놓고서 정국은 잠든 태형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만 봤다.
-
정국이 카네이션을 들고 나타났다.
“나 니 어버이 아닌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던 정국이 태형의 말에 물을 뿜었다. 그도 그럴게 그날은 어버이날이었고 카네이션은 그런 의미니까. 정국이 어이없단 얼굴로 태형을 바라봤지만 정작 태형은 평온한 얼굴로 카네이션을 보고 있었다.
“나미가 만든 거요. 내 동생.”
육학년인데 학교에서 만들었대요. 형이랑 내꺼 하나씩.
“나미가 내꺼도 만든 거야?”
“네. 귀엽죠.”
“너무 예쁘다. 가위질 엄청 잘했어.”
그 남자에게 아들이 둘이 있다고 그랬었다. 태형은 다시금 그 말을 상기했다. 나미 보고 싶다. 삐뚤삐뚤 귀여운 모양새로 잘린 빨간 색종이를 바라보면서 태형이 작게 속삭였다. 어쩐지 부드러워진 목소리나 예쁘게 휘어진 두 눈을 보면서 정국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같이 밥 먹어요. 전나미도 형 보고 싶대요.”
그래도 돼? 톡 튀는 목소리와 그간 보지 못했던 밝은 얼굴. 마주친 두 눈은 수성이며 다이아몬드 같은. 영롱하고 투명한 것들이 박힌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국은 잠시간 숨을 참았다. 이래선 안 되는데 머저리같은 습관이 들어버렸다. 정국은 자주 태형의 앞에서 숨을 참게 됐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종종이 아니라 자주. 큰일이었다.
“그렇게 좋으면 같이 살아도 되는데.”
“넌 진짜 같이 사는 거 너무 좋아해.”
태형은 나미가 만든 카네이션에서 눈을 못 뗐다. 고작 빨간 색종이에 검은 색종이를 동그랗게 오려 붙인 것뿐인데. 태어나 처음 꽃다발을 받은 사람처럼, 자꾸만 설레 죽겠다는 듯이 굴어서 정국은 그런 태형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네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정국은 태형이 좋았다. 무인도가 두렵지 않을 만큼.
4.
계기라 하면 제니의 습관이다.
제니는 정국과 나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별 인형을 하나씩 선물했었다. 나미는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지만 정국은 얼떨떨했다. 본래 인형을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곧 성인인데 이런 걸? 다소 반항적인 생각이 들어 그랬다. 하지만 제니 앞에서 티내진 않았다. 정국은 제니의 첫인상이 좋았고 무엇보다 어머니가 사고로 죽은 후 아버지가 간만에 편해보여서 좋았다. 전나미는 어렸을 때부터 예쁜 것엔 사족을 못 쓰는 애였으니 나미가 제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당연했다. 거기다 인형까지 안겨줬으니 전나미에게 제니는 거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땡글땡글한 두 눈이 제니 앞에선 하트로 변했는데 제니도 그런 나미를 아주 많이 귀여워했다.
아버지와 비슷한 키에 시원한 미인형. 또 화려한 옷차림. 제니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세 식구가 살던 집에 금방 적응해나가는 듯, 싶다가도 이따금씩 병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자주 구토했고 종종 술에 취해 고성방가를 해댔다. 그런 이유로 네 사람이 함께 산 기간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제니와 아버지가 거처를 옮긴 후에도 네 사람은 자주 모여 식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니는 야광별 스티커며 별 인형, 지구가 그려진 잠옷 따위를 나미에게 선물했다. 후에 이런 거 그만 주셔도 된다, 거절하는 정국에게 제니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린애가 별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잖아. 혹시 아니야?’
‘뭐 싫어하진 않지만 나미는 딱히 좋아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제니가 주는 거라 저렇게 좋아하는 건데 자꾸 주면 습관 들어서요.’
‘나랑 태형은 좋아했거든.’
‘태형?’
정국은 놀랐다. 제니가 자식이 있는지 몰랐으니까. 방방 뛰다 물을 엎지른 나미에 아버지는 허둥지둥 자리를 치우고 있었고 제니는 정국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모든 어린애가 별이나 지구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 작은 목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형이라는 애는 나미랑 동갑이에요?’
‘김태형은 너보다 나이가 많아.’
의식하고 나니 제니의 말 속엔 태형이 자주 등장했다. ‘내가 보기와 달리 2세를 만들진 못해서.’ 농담처럼 말했지만 제니는 그 말을 할 때마다 꽤 쓸쓸한 얼굴을 했다. 정국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제니의 집착 같은 습관은 태형에게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제니로부터 시작 돼 태형에게로 옮겨간 것일까. 정국은 그때부터 이 자리에 태형도 함께 하게 될 날을 자연스레 기다렸다.
제니가 별에 집착하는 건 습관이었다. 그 날 정국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후에 만나면 또 그런 것들을 사들고 나타났으니까. 그래서 정국은 깨달았다. 저건 습관 같은 거구나. 그리고 주말마다 별을 보러 산을 탄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느꼈다. 제니는 신비로웠고 물음표 투성이지만 그런 것이 납득되는 사람이었다. 점점 더 궁금해졌다. 태형을 만난다면 그런 제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하늘에 뜬 별말고도 혹시 또 다른 별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건지. 제니와 태형에게만 특별한 별이 있는 건지. 또 당신도 정말 별을 좋아하는 건지.
정국은 바로 알아봤다. 저 사람이 태형이구나. 제니의 말대로 곧 고교 졸업을 앞둔 자신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다.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리고 비로소 태형이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을 때. 정국은 깜짝 놀랐다. 정국에게 그때 그 순간은 반쯤 장난이었고 반쯤은 말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떠나버려서 정국은 슬퍼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넘쳐흐르는 것 같은데 제니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자기 하나인 것 같아서. 그들에 대해 떠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만나게 된 태형은 언제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태로웠다. 그런 서늘한 시선으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태형이 직접 입을 떼지도 생각을 알려준 것도 아닌데 정국은 알아버렸다. 태형의 얼굴은 제니가 구토를 하거나 온 집안을 뒤집어엎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또는 어머니가 죽어버렸을 때 쭈그려 앉아 아이처럼 울던 아버지가 스쳐갔다. 정국은 이젠 더 이상 사람과 살아가는 게 무서웠다. 어머니가 죽었고 이젠 아버지와 제니가 죽어버렸다. 다음은 나일까 나미일까. 이런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 들일수록 죽어갔으니까. 그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점점 아예 아닌 것도 아닌 것만 같아서. 근데 김태형은,
‘그럼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때요?’
자기가 죽였다고 믿는 얼굴이잖아.
계기라면 그랬다. 두 번째로 만난 태형은 정국을 살고 싶게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죽고 싶게 했다가 또 여섯 번째는 살고 싶게 했다. 태형은 제니와는 다른 의미로 신비로웠다. 태형은 정국을 단단하게 만들면서도 약하게 만들었다.
왜 죽어버리려고 했어요? 미처 묻지 못했다. 혹시나 마주앉아 밥 먹고 있는 지금의 태형이 진짜가 아닌, 정국의 환상 일까봐.
“진짜 나랑 안살 거예요?”
“나랑 나미 둘만 살면 안 돼?”
“개치사하다.”
그렇대도 사랑할거지만.
5.
“너 이제 꽃 그만 사와.”
벌써 겨울이다. 정국과 태형이 함께 맞게 된 첫 겨울이었다. 그 사실에 정국은 확실히 들떴다. 거기다 곧 태형의 생일도 있으니까 정국은 최근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더 늘렸다. 이 또한 태형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막 귀가해 뜨끈한 방바닥에 몸을 녹이고 있던 정국은 뜬금없는 태형의 말에 커다란 눈만 깜빡댔다. 그게 갑자기 뭔 소리에요?
“나 꽃 안 좋아해.”
그 말에 정국이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거짓말. 그럼 그때 카네이션보고 좋아 죽던 건 뭔데.”
“그건 나미가 준거잖아. 또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가위로 오려 만든 건.”
“와 그걸 육 개월이나 지난 지금 말한다고요?”
그건. 태형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정국은 한 번 해보라는 얼굴로 그런 태형을 빤히 쳐다봤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다 보여서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렇다보니 눈이 거의 세모가 돼 노려보는 수준이 돼버렸고 그에 태형이 더 안절부절 했다. 아 그러니까 최근에 정국은,
“그건 뭐요.”
“니가 나 좋아해서 계속 사오는 줄 몰랐어. 됐지?”
태형에게 고백했다.
“돼찡?”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답은 듣지 못했지만.
정국은 그 날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1차에 2차까지 달렸다. 그래도 열두시가 되기 직전에 귀가했는데 그것이 본인 집이 아닌 태형의 집으로 한 것이 문제였다. 태형은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 (나미가 선물해준) 수면안대까지 끼고 누워있었는데 벌컥 들이닥친 정국으로 인해 어이가 없었다. 그 나이 남자애 답지 않게 빨래를 사랑하고 향기에 집착하는 주제에 그때의 정국에게선 술 냄새를 풀풀 났다. 그리곤 녹차를 달라고 징징댔다. 원래 녹차를 먹지도 않는다면서 처음 이 집에 온 그날부터 별스럽게 녹차만 찾았다. 태형은 그런 정국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곤 결국 부엌으로 사라졌다. 툴툴대는 소리에 정국이 킥킥 웃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렇다보니 눈앞이 흐릿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멀리 선 태형이 보였다.
‘거기 있지 말고 여기로 와요.’
‘니가 보냈잖아.’
‘미안해. 여기로 다시 와라 응?’
답이 없었다. 태형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정국은 새삼 안달이 났다. 매일 봐도 보고 싶고 방금 들어도 듣고 싶어. 방금처럼 징징대서 다 들어주는 거라면 내 마음도 좀 들어주면 안 되나? 그게 제일 급한데. 그간 잘 참았다 생각했던 마음이 들쑥날쑥했다.
태형이 드디어 티백이 담긴 머그잔을 들고 다가왔다. 혹시나 엎지를까 싶어 바로 손에 쥐어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뒀다. 역시나 정국은 녹차 따위 쳐다보지도 않고 다가온 태형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태형은 취한 정국이 처음이라 나름 재밌었다. 그래서 그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머리가 좀 길었나. 고동색에 동그란 머리통. 졸린 지 풀린 두 눈. 붉은 두 뺨. 태형의 시선이 곳곳에 닿았다. 정국은 시선을 닿는 걸로도 모자라다는 듯이 태형의 곳곳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에 태형이 작게 웃었다.
‘혹시 나 때문에 상처받은 적 있어요?’
‘…’
‘그랬다면 미안해요. 누굴 사랑하는 게 처음이라 서툴러서 그랬어요.’
‘…’
‘그래도 나 미워하지 마요. 계속 옆에 있어요.’
‘…’
‘죽으면 안 돼. 태형아.’
‘…’
‘사랑해요.’
태형은 말이 없었다. 대신 정국의 붉은 뺨을 쓰다듬었다. 정국은 그 손길에 눈을 감고 있다, 까무룩 잠들었다. 태형이 입을 벙긋댔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
씻고 나오니 태형이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이부자리도 없이 옆으로 누운 몸이 납작했다. 정국은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냉장고를 한번 열었다가 조심히 닫았다. 그리고 힐끔 태형 쪽을 바라보자 졸린 얼굴의 태형이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미 언제 온다고 그랬지?”
“내일 모래요.”
나미는 곧 중학생이 된다. 그리고 이틀 전 친구들과의 이별 여행을 떠났다. 그래봤자 모두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는 주제에. 정국은 그저 우스웠지만 그런 전나미가 아직도 세 살짜리 애 인줄 아는 태형은 이틀 전부터 잠도 잘 못 잤다. 그리고는 저 질문만 벌써 열 번째였다. 친형인 정국보다도 더 자주 연락하고 아주 서로 각별해 죽으려 하면서. 결국 정국이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하고 툴툴댔을 땐 태형은 나미가 걱정할까봐 그러지. 같은 말로 정국의 속을 뒤집었다.
정국이 누운 태형의 곁으로 다가가자 태형이 옆에 누우라며 바닥을 두드린다. 정국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곧장 몸을 눕혔다. 보일러가 막 돌아갔는지 방바닥이 따끈따끈했다.
“내가 왜 좋아?”
졸음에 감았던 눈을 빠르게 떴다. 정국이 흔들리는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웃고 있었다. 아, 어쩐지 울 것 같아. 거의 혼잣말이었는데 태형도 들어버렸다.
“울지 마 바보야.”
“저 진짜 눈물 없는 거 알잖아요.”
“너 내가 생일날 미역국 끓여줬을 때도 울었잖아.”
그때가 또 생각나 태형이 킥킥 소리 내 웃었다. 정국은 언제나 그렇듯 그 얼굴에서 눈을 못 뗐다. 태형도 그런 정국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정국아 나도 이제 알아. 행복.”
“행복이요?”
“나 행복한 것 같아.”
정국은 태형보다 절대 먼저 잠들지 않는다. 처음엔 몰랐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쌓이면서 태형은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정국은 자주 태형의 표정을 살핀다. 또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삼십분이 걸리는 거리를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온다. 그 거리를 십오 분 만에 뛰어 와놓고 정작 문을 바로 열진 않는다. 숨을 고르고 진정된 후에야 평온한 얼굴로 나타나 태형에게 인사한다. 그러니까 그런 정국으로 인해 태형은 자꾸만,
“나미가 행복을 모르고 크는 게 싫었어. 그래서 나 노력했어. 근데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근데 그냥 언젠가부터 너를 보는데 행복했어. 나미가 잠든 걸 보는데 행복했어.”
“…”
“정국아 나 살고 싶어.”
“…”
“너랑 나미랑 오래오래 살래.”
정국은 참지 못하고 태형을 껴안았다. 그리곤 곧 눈물이 날 것 같다 생각했는데 자신은 이미 펑펑 울고 있었다. 치사하게도 이럴 때만 어른이 돼버리는 태형이 흐느끼는 정국을 마주 안았다. 정국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길이 소중했다. 태형은 후련했다. 조금 더 거대한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간략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반응해주다니. 맞닿은 정국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근데 그건 태형 자신의 심장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그날 밤 태형은 꿈을 꿨다. 제니가 나왔다. 태형과 제니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제니와 태형이 마주앉아 대화한 시간은 몇 없었고 그래서 태형은 이게 꿈이구나 했다.
우리 엄마를 사랑했어? 태형이 물었다.
무엇인가에 꽂혀 깔깔 웃고 있던 제니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아주 많이. 니네 엄마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거든.
태형은 중얼댔다. 나도 보고 싶다. 우리 엄마. 그 말에 제니가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부드러운 눈으로. 제니가 말했다.
너는 걔를 아주 많이 닮았어. 그러니까 세상 모두가 널 사랑할 거야. 넌 그러라고 태어났거든.
태형이 배시시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태형은 선명해지는 시선에 자신이 지금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꿈이었지만 꿈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 제니와 언젠간 나눴던 대화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태형은 지금 이 순간 제니가 참 많이 보고 싶었다. 서러운 마음으로 천천히 고갤 돌리자 바로 옆에서 잠든 정국이 보였다. 태형은 지금 정국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사실 하나로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순식간에 살고 싶어졌다. 소중해졌다. 태형이 다시 눈을 감는다. 이젠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태형은 더 이상 형태 없이 부유하지 않는다. 사랑받고 있다. 정국으로 인해. 정국으로부터.
“사랑해. 정국아.”
몽롱하게 속삭인 그 고백에 잠든 정국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