キツネの雨 ━ 군소
キツネの雨 ; 여우비
1.
이와테현 카루마이마치 카츠하시 상점에서 400m, 카루마이 파출소에서 300m 떨어진 그곳엔 유우키가 산다. 새카맣고 가녀린 나의 유우키.
2.
유우키 테루후미, 그게 김태형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계집애 이름마냥 희망이 뭐냐 바락바락 대드는 것을 그 집 여자가 데려다 지장을 찍게 했단다. 영악한 여자 같으니라고. 유우키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는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된 유우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등장해 아버지의 마음을 홀랑 낚아챘다고 했다. 뽀얀 살결하며 커다란 눈망울까지 어머니를 고대로 빼다 박은 여자를 유우키 아버지는 냅다 새어머니 자리에 박아넣었다. 하긴 박힌 돌이 빠진 마당에 굴러온 돌이 자리 하나 차지 못할까. 덕분에 낙동강, 아니지 유키야가와 강의 오리알이 된 유우키는 눈물을 머금고 일본으로 끌려왔다. 뭐 그거 하나는 죽기 전까지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라지만, 이따금씩 펑펑 울며 엄마 엄마 하고 우는 유우키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그 여자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 참 이건 비밀인데, 유우키네 아버지는 유우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유우키의 고국에서 고작 30분 떨어진 이 섬나라가 퍽 안전해 보였는지, 이 작은 마을 쪽방에 와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슈퍼 주인인 네코 아저씨가 봤다 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게 아마 5년도 더 된 일이었을 게다. 불쌍한 유우키. 그래봤자 꼴초마냥 뻑뻑 피워대는 바람 상대가 일 년에 한 번 꼴로 바뀌었다는 것은 유우키도, 그 여자도 평생 모를 테지만.
3.
"来たの?" (왔어?)
"少し遅れて到着した、申し訳ありません。" (조금 늦게 도착했다, 미안.)
뚱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유우키에 활짝 웃어 보이자 푸스스 웃어온다. 늦었어 료스케!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한다. 료스케 히로토,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청량하고 맑기는커녕 온통 더럽기 그지없는 생각들로 가득한 아들을 모르는지 부모님은 친히 이름을 내려주셨지만, 그 이름이 발하는 것은 오직 유우키의 입에서 발화될 때뿐이었다.
"今日も試合をしたの?" (오늘도 경기를 했어?)
"うん、試合で勝った。" (응, 이겼어.)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대개 이야기는 유우키가 주도했고, 그것에 대답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 되려 묻기라도 하는 날엔 유우키에게 머리를 죄다 잡혀 뜯기는 날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다다미 위에 툭 던져놓으면 유우키가 폴짝 뛰어들어 가방을 북북 뜯는다. 배구화를 찾기 위함이었다. 유우키는 배구화를 좋아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신상 배구화가 나왔다 하면 내 치수에 맞게 신발을 주문해 신으라 명했다. 그럼 나는 좋다고 그를 신고 다녔다. 물가 비싼 일본에서 꽁돈으로 배구화를 얻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쯤 되면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료스케 히로토는 유우키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동성적인 감정으로.
4.
말마따나 이성은 아니었다. 유우키 가랑이 사이에 그것이 달려있단 사실은 일찌감치 확인했다. 그렇다고 뜨끈한 욕탕에 들어간 유우키의 것을 보려 관음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에 자유분방한 유우키가 여름만 되면 옷을 홀딱 벗고 앞마당을 기어다녔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펜스가 이중삼중으로 감싸고 있어 마을 사람 1이 나체의 유우키를 발견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내가 싫었다 내가. 온몸으로 막아서고 나서야 만족스러웠으니 이 점은 양해 부탁한다.
5.
아무튼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료스케 히로토는 유우키 테루후미를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유우키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배구 경기에 이겼다는 소식을 전하면 차례로 유우기 표 배구화 착용 여부, 스파이크 성공 횟수, 응원하러 온 여자애들 수를 물어보곤 마지막에 다이스키(大好き)!를 외쳤으니 나를 배구화만큼은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동정은 하지 말자. 배구화는 유우키에겐 꿈이고 희망이었다. 정확히는 걷지 못하는 유우키에게 배구가 꿈이고 희망인 것일 테지만.
6.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유우키는 걷지 못했다. 걷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이거나 그거나 도긴개긴이었다. 일본으로 들어온 지 1년째 되던 해 유우키는 가출을 감행했었다. 가출 사유는 '향수병'이었다.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저와 고국으로 도망을 가자는 유우키에 고개를 내저은 지도 벌써 1년째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저 혼자라도 가겠다며 씩씩거리던 유우키는.
"…ごめん." (…미안해.)
"…."
"私を許していなくてもよい。"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산소마스크를 쓴 채 카루마이마치로 돌아왔다. 유우키의 가출 소식을 뒤늦게 접한 부모가 실종신고를 했을 때는 이미 경찰이 허허벌판 대로변에서 넝마가 된 몸뚱이를 수거한 뒤였다. 의문의 남자에 의해— 당했다고 했다. 젓가락마냥 가느다란 다리는 당연하게도 그를 버텨내지 못하고 주인에게서 영원히 이탈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다행히도 범인은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범인은 유우키와 동갑인 남고생이었다고 한다. 그에 죄책감이 배가 되었다. 유우키의 부모님은 괜찮다며 나를 위로했지만, 그것은 유우키 부모님의 몫이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더더욱. 이는 온전히 유우키에게 달려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용서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조금이나마 이 죄책감을 즐기고 싶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이다. 말했지 않은가. 청량하고 맑기는커녕 더럽기 그지없는 인간이라고. 그래, 나는 유우키를 위해 기꺼이 인간 말종을 자처했다.
7.
유우키가 관심을 보인 것은 독특하게도 배구였다. 마라톤, 허들 등의 육상 종목은 가뿐히 제낀 유우키가 손가락으로 콕콕 집어가며 열변을 토하게 만든 배구를, 나는 사랑했다. 배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걷지 못하는 유우키를 대신해 날기 위함이었다. 땀내 잔뜩 밴 남탕이어도 괜찮았다. 경기에서 이기고 온 날이면 유우키가 웃어줬으니, 그걸로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유우키의 아픔을 담보로 배구를 즐겼기 때문에? 아니면 평생 미안해야 할 유우키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다면, 그를 알아차렸다면.
"私はあなたを愛していな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私たち付き合ったことがなかった。" (우린 사귄 적도 없었잖아.)
이런 이별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8.
이별이라고 하기도 뭐했다. 사귄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별이 있을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심지어 꽹과리도 울린 셈이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는 유우키의 두 눈을 하늘로 덮어 가려내고 싶었다. 새카만 두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그만 엉엉 울고 싶어졌다.
그 날은 처음으로 배구 경기에서 참패를 당했던 날이었다. 옆동네 고등학교와의 시합이었는데, 블로킹을 하다 손가락 사이가 찢어지는 바람에 시합은 뛰지도 못했다. 억울한 마음에 유우키에게 달려와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자 유우키는 말했다. 그러면 진 거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었지만 꽉 막힌 속은 서운함을 토로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통한 사이인데 이럴 것까지는 없지 않나.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으면 유우키가 콕 찔렀다. 있잖아 료스케. 응.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뭐? 우린 사귄 적도 없었잖아.
이게 무슨 말이람. 사랑하지 않는다고? 사귄 적도 없었다고? 멍하니 유우키를 바라보면 얇은 유카타를 펄럭이며 더위를 삭히고 있었다. 30도를 웃도는 바깥 공기에 미간을 찌푸리는 것마저 아름답다 느끼는 18세 남고생은 방금 전 질식사를 당했다. 새하얀 웃음에 사르르 부서지는 햇살에 시야가 그만 빙글 돌고 말았다.
9.
그대로 유우키네 집을 빠져나왔다. 그 고운 손에 들린 배구화를 낚아채듯 빼앗아 가방에 쑤셔넣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유우키가 지난번 들려줬던 한국 노래처럼 하늘에선 비가 주륵주륵 내리기 시작했다. 포기하라는 건가. 그래, 막말로 허연 유니폼마저 짙은 회색이 되는 마당에 이 감정이 바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고이 접힌 흰색 삼단우산을 내려다보면, 꼭 유우키를 닮아있었다. 고귀하고 순결한 나의 유우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유우키. 유우키, 유우키, 나의 유우키.
유우키 나는 말이야.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너를 사랑하라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거야. 그래서 나는 너를 볼 수 없어. 지금처럼 계속 너를 앞에 두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리고 말 거야. 앞에 두지 않아도 그럴 테지만.
"さようなら。" (안녕.)
"今行くよ?" (지금 갈 거야?)
응, 갈 거야. 멀리멀리 떠날 거야. 네가 좋아하던 배구도 그만둘 거야.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유우키, 나 좀 도와줘. 나 좀 살려줘.
10.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했다. 유우키는 생각보다 더 집요한 그것이었다. 잠을 자려고만 하면 유우키가 나타나 볼을 쓰다듬고, 유니폼과 배구화를 버리려고만 하면 갑자기 나타나 펑펑 울어댔으니 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펄떡펄떡 활어마냥 뛰어대는 심장은 주기적으로 유우키를 필요로 했다. 삭제했던 메일을 죄다 뒤져 유우키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아내면 그걸로 그 날은 마무리가 되었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그깟 유우키 하나 못 잊어 버둥대는 꼴이 영 폼이 안 났다. 하지만 나는 유우키와 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고민없이 유우키를 선택할 멍청한 놈이었으므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이 여름 방학 시즌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인 즉, 정당한 이유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뻑하면 유우키를 외치며 달려나가던 아들이 집에만 붙어있어 이상함을 감지한 부모님은 캐묻기 바빴지만, 답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는 아들을 완벽한 이성애자라고 생각하는 부모님을 위한 일종의 효도였으니 둘 다 손해를 볼 것은 없었다. 적어도 나는, 료스케 히로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11.
유우키를 보지 않은 지도 이제 2주가 훌쩍 넘었다. 아니, 겨우 넘었다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려나. 아무튼 나는 그 2주 동안 주인 잃은 개새끼마냥 낑낑거리며 동네를 활보하기 바빴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유우키와 마주칠 확률이 0에 수렴했으므로 과감히 그런 결정을 내렸다 볼 수 있었다. 물론 유우키 한정으로 약해지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에 마땅한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지만 그걸로 되었다.
2주란 꽤나 길었고, 퍽 짧기도 한 시간이었다. 제대로 밥 먹고, 잠 자고, 운동하기만 해도 금방 지나가는 하루가 14번만 반복되면 2주였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살아냈다. 한순간이라도 루틴을 놓치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우키를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학임에도 아침 8시에 일어나 밥을 먹는 남고생은 이 뜨거운 열도에 저 하나뿐이리라. 그러나 여기서도 당신은 동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 또한 유우키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었다. 더 정확히는 유우키를 잊기 위해서였지만, 뭐 그것도 그를 위한 일이지 않은가.
12.
아무래도 료스케 히로토라는 인간은 글러먹은 게 분명했다. 어젯밤 꿈에 유우키가 나와 몽정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 방학은 무사히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자위를 해보았지만, 이내 눈치껏 수긍하고 목을 졸라맸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유우키, 나의 유우키가 언제 또 그런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줄지 어찌 알겠는가.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그를 끌어안았다. 그 끝이 절망일 것을 알면서도 마냥 좋았으니 피차일반이었다.
해서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새파란 지붕을 한 새하얀 집. 꼴에 살겠다고 무의식중에 유우키를 찾아온 자신이 가증스러워 주먹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적당히 강하고, 또 적당히 나약한 것이 열사병에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기 딱 좋은 사이즈였다. 아니, 차라리 이 편이 더 다행일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려 했다면 그때는 제정신으로 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두 발로 걸어서 온 것이 나름의 기적이었다. 땅바닥 가까이 몸을 납작 엎드려 유우키가 언젠가 한 번쯤 밟았을 콘크리트 파츠를 찾으려 했을지도 몰랐을 테니 말이다. 아아,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13.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결국엔 미쳐버렸다. 유우키에게로 오는 길이 이토록 힘들었던가?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었다. 유우키는 나를 이끄는 무엇이었다. 율법이고 종교였으며 또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를 어기고 벗어나려고 드니 벌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발가벗은 주신의 뜻을 거부하려 한 유다의 끝이 이러했을까. 그도 이렇게 괴로워하다 어장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택했을까. 질퍽한 피밭이 온통 흰색이었다. 여우비가 내린다. 죽음이 내린다. 유우키, 나의 유우키.
살려줘,
살려줘,
나의 유우키를 살려내줘.
14.
"あの家の息子もおかしくなったんですって?"
(그 집 아들도 미쳤다면서요?)
"3年前のあの事件の犯人ですよね?"
(3년 전 그 사건의 범인이죠?)
"ユウキ殺した事ですか?"
(유우키 죽인 일 말하는 거죠?)
"もう3年にもなったんですね。"
(벌써 3년이나 됐네요.)
그때 료스케가 유우키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당해도 싼 것 같아요. 가장 친했던 친구가 범인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15.
"来たの?"
(왔어?)
"少し遅れて到着した、申し訳ありません。"
(조금 늦게 도착했다, 미안.)
"おくれ りょうすけ!"
(늦었어 료스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