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 검연

야, 이별도 재능이야.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재능들이 있다. 그중 내가 가장 부러워하며, 갖지 못해 서러운 재능은 '이별'이다. 이별에도 재능이 필요하다. 사납고 날이 선 말투로 서로의 지난날의 행적들을 헐뜯는 이별, 한 명이 잠수를 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당하는 이별. 상대나 자신이 바람을 피웠거나 바람을 피운 것 같다며 의심하며 서로를 낭떠러지로 내치다, 결국 한 명이 지쳐서 떠나는 이별. 상대의 지인이 전해주는 우리의 이별.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이별들이 존재하고, 나는 짧은 생이었지만, 그중 사람들이 최악이라 말하는 이별은 다 겪은 것 같다.

미디어나, 소셜 커뮤니티에서 흔히 보이는 상대에게 잘 보이는 방법,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는 방법. 정말 많은 것들이 정보의 홍수라는 말처럼 많은 곳에 퍼져있었지만, 이별을 잘 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별을 하고, 그 이별에 대해 극복하는 방법이라든지. 뭐, 다양한 방법이 정말 많았지만 내가 경험한 결과. 실전에서는 그딴 거 다 필요가 없다는 거다.


'이별은 다 힘들다.'라는 말 그대로, 이별에는 정말 많은 고통이 잇따른다.


이 말처럼, 나는 지금 이별의 후유증으로 며칠을 울다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다 못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밖을 나왔다가, 전 애인을 마주치면 어쩌냐는 나의 말에 친구의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친구는 올해부터 성인이 되어 같은 학교로 진학하게 된 동생과 함께 자취 중이었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의 동생에게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 날 본 동생은, 몇 잔 마시지도 못하고 뻗어버린 친구를 방 안으로 치워두곤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서로 잔을 주소 받으며, 아주 술을 물처럼 마셔댔고. 그 결과,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지 모든 게 어지럽고 서러워서.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는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야, 정국아..."

"왜요."

"너는 이별을 어떻게 하냐?"

"뭔 소리에요."

"왜, 나는 항상 끝이 이 모양이냐...?"


연애를 하고 처음은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주는 상대와, 온 평생을 함께 할 것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고, 그 이후는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고 이별했다. '아무래도, 이별에는 엄청난 재능이 필요한 게 분명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의 말에, 정국은 말했다.


"형, 형은 이별을 잘 하는 재능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안 만나는 재능이 더 필요해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뭔데..."

"아니, 그건 형이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보다 연애는 몇십 번을 더 해본 사람이...' 그렇게 중얼거린 정국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태형은 정국의 말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같이 불나방을 닮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본인의 외모는 남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런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면. 연애를 하는 도중에도 자신의 외모만 보고 다가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다지 꾸미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자신이 데이트가 있는 날 고등학생 때부터 써왔던 뿔테안경을 무의식중에 끼고 나가면. 상대는 표정을 굳히며 그날 계속 안경을 벗기려 하거나, '자기는, 안경 안 쓴 게 더 예뻐.'하고 하염없이 되뇌었기 때문이다. 친구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서슴없이 했었고, 그런 상황을 보던 친구들을,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자신을 보며 '너는 속이 없냐?'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태형은, 취기 때문인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엉엉 울며 본인의 서러움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속이 없겠냐고. 나도 억울한 게 많지만, 일단 사귀는 사이잖아. 그럼 배려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다들 나보고 속이 없대!"


갑작스러운 태형의 눈물과 소리침에 당황한 정국은, 쥐고 있던 술잔에 술을 따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형, 어... 마실래요...?"

"줘!"


정국의 손에 쥐여져 있던 술잔을 빼앗듯이 쥔 태형은, 술잔 안에 담긴 술을 한 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빈 잔을 머리 위로 한번 털던 태형은, 그 술잔을 다시 정국에게 돌려주고는 천천히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그렇게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는 멍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 그냥, 내 운명이 아니었나 봐..."


지금까지 몇십 번이나 반복한, 운명이 아니라는 핑계를 또다시 입 밖에 꺼내두곤 생각했다. 참 우습다, 이 정도면 그냥 내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 거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서러움에 눈물이 나, 눈을 감았다 이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 태형을 말없이 지켜보던 정국은, 어느새 비워진 소주 병들을 바라보다. 테이블 위에 얼마 남지 않은 병을 들어 입에 털어 넣고, 태형을 업어들고 본인의 침대 위로 살포시 눕혀두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죽은 듯이 잠에 든 태형은, 현재 겪고 있는 이별의 아픔을 보여주는 듯 많이 메마르고, 또한 상해 있었다. 여러 번 뜯었는지 입술에는 피딱지가 앉아있었고, 눈은 너무 많은 물을 내뱉어 부어있었다. 그런 태형을 보던 정국은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었고, 결국 피를 보고 나서야 태형에게 이불을 덮어주곤 방을 나섰다.


정국은 자신의 방문을 닫고, 그 문 앞에 앉아 생각했다.
술에 취한 채로 내뱉는 진심은 멋이 없다, 그리고 너무 비겁하다.
언제든지 술을 핑계 삼아 도망칠 수 있었으니.
그러니 일단은 참아야 한다. 내가 섣불리 전한 진심에, 형이 놀라 도망칠 수 없도록.
형이 충분히 휴식을 가지고, 건강한 마음으로 다시 운명을 찾아 나설 때.
그때까지 기다려 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 형과 같은 대학을 왔는걸.



조급해 하지 말자.



정국은 그렇게 말하곤, 몸을 일으켜 형의 방으로 향했다.





* * *





한창 커플들이 벚꽃을 보러 갈 시기에 이별을 했었기 때문일까, 왜인지 더 마음이 아파서.
사실은 헤어진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고도 태연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학교 수업은 며칠 자체 휴강을 해버렸다. 작게 한숨을 쉰 태형은 더 이상 학교에 가는 것을 미룰 수만은 없어. 한숨을 내쉬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잠에서 깨, 커튼을 걷어 오랜만에 따스한 빛을 받았다. 태형은 그제야 좀 괜찮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심장이 미어지는 듯했는데, 결국 그 아픔들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익숙해지는 건가 싶기도 했다. 태형은 커튼을 걷은 김에, 창문을 열고는 조금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었다. 학교 갈 준비나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띠링- 하고 울리는 핸드폰을 모른 채.







- 형, 오늘 학교 가요?

- 같이 갈래요?




* * *




학교를 나간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학교는 뭐, 전과 같았고. 전공수업도 듣고, 교양수업도 듣고, 과제도 하고. 하는 것은 전과 같았다. 달라진 점이라곤, 애인과 함께였던 도서관은 이제 정국이와 함께 가게 되었다 정도?

정국이와는 언제부터인가 함께였다.

오랜만에 학교를 가려 집을 나섰을 때,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국이와 함께 학교를 가게 되었었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하며 함께 학교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아까의 안도는 어디 가고, 태형은 전 애인을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며 걸었고. 그런 자신의 뒤를 정국이 아무 말 없이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학교 안에 있는 분수대쯤에 도착했을까, 어디서 '김태형!'하고 활기차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태형은 고개를 들었고, 다가오는 사람이 보여 굳고 말았다.
그는 같은 과 동기였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지만, 그는 과에서 누군가 누구와 사귀면 그에 대해 떠들고 놀리기를 좋아했다. 어디에나 있는 그런 인간들. 그런 만큼 헤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러게 같은 과 애랑 사귀면 안 된다니까? 다들 CC도 안된다 하는데 CCC가 뭐냐?' '어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하며 친하지 않은 친구들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해댔다. 그런 그가 다가와, 태형의 어깨에 손을 두르곤 말했다.


"야, 김태형.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개학한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나와?"
"... 아, 뭐 그러게. 오랜만이다."


태형은 그의 손이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팔을 손으로 집어 풀었다. 그런 태형의 반응에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학교는 왜 안 나왔냐?"
"... 뭐, 그냥."
"에이, 헤어진 게 어떻게 그냥이야."


애초에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할 말만을 쏟아냈다. 아, 듣기 싫다. 잠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잠시 잊고 있던 정국이 자신의 앞으로 와 그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곤 그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며 그의 시선을 돌렸고, 그는 '아, 어어...' 하며 자신도 모르게 대화의 흐름을 빼앗겼다.

태형은 자신의 앞을 가려준 정국의 등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정국이 등이 원래 이렇게 넓었나?' 그 사이, 몇 번의 대화를 끝으로, 그는 정국을 친한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고. 정국은 몇 차례 맞장구를 쳐주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저... 태형이 형이랑 같은 수업 듣는데,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아서 이만 가보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했고. 정국은 뒤돌아 태형에게 말했다.


"갈까요?"
"어? 어어...."


정국은 태형의 소매 끝자락을 쥐고는 걷기 시작했다. 태형은 익숙하지 않은 정국의 모습에, 그저 앞서 걷는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수대 앞을 벗어난 그들은 수업이 있는 본관 1층 음료 자판기 앞에 도착했고. 정국은 자판기에 지폐를 넣어 사이다 하나를 뽑아, 태형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요."
"... 응, 고마워."
"뭘요."


정국은 작게 미소 지으며, '저기 잠깐 앉았다 갈까요?'하고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1층 휴게공간에 앉아 태형은 차가운 사이다를, 정국은 물을 마셨다. 짧은 정적이 있고, 태형은 정국에게 말했다.


"아까 걔, 좋은 애는 아니야."
"알아요."


태연한 정국의 답에 둘은 또 잠시 말이 없었고, 이번엔 정국이 입을 열었다.


"형한테 시비 거는데, 그게 좋은 사람일 리 없잖아요."


그런 정국의 말에, 태형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바빴고, 그런 태형을 보던 정국은 이번엔 소리 내어 웃고는 태형에게 말했다.


"아무도 형한테 시비 못 걸게, 내가 이제부터 붙어있어야겠네."




* * *




정국은 그 후로, 그 말을 지키려는 듯 학교에 갈 때, 수업이 끝나고, 공부를 할 때, 동기들과 술을 마실 때. 언제든 자신이 가는 곳이라면 함께 하려 노력했다. 친구가 그런 정국이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태형이 귀찮게 하지 마.'하고 말했었는데. 그런 친구의 말에 눈을 토끼처럼 크게 뜨며 '형, 저 귀찮아요?'하고 물어와, 괜찮다고 말했었다.
사실 귀찮다기보다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아온 동생이었기 때문에 어색했었던 게 맞기도 하고.

그렇게 서서히 이별의 아픔은 저물고, 눈물 흘리는 날들 보다 웃는 날이 더 많아졌었다.

자신을 정신없게 하는 정국이 있었기에.

어색함은 점차 고마움으로 변해갔고, 정국이 자신을 배려하고 챙겨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태형도 정국을 더욱 챙기기 시작했다. 친구의 동생에서, 아끼는 동생으로. 둘 사이의 변화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렇게 오늘도, 오전 수업이 끝난 태형과 정국은 학식은 맛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 정국이 알아온 싸고 맛있는 분식집으로 가기로 했다. '형, 형은 1학년 때 교양 뭐 들었어요?','형 햄버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가는 동안에도, 동그란 눈 망울로 질문을 해오는 정국 덕에, 심심할 틈은 없었다. 분식집에 도착한 둘은 돈가스와 김밥을 시켜놓고, 물을 따라 마셨다. 


"형, 저 알바나 할까요?"


갑작스러운 정국의 물음에, 태형은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 알바?"
 "네, 요즘 형이 생활비 좀 보태라고 엄청 뭐라 해요."
"아, 뭐... 그건 그렇겠지..."


대답을 하던 태형은 잠시 말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정국이가 알바하면, 난 뭐 하지.'


별생각 없이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발견한 태형은, 새삼스레 우리 둘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음식이 나왔고, 태형은 썰려져 나온 돈가스를 정국의 앞접시에 몇 개 옮겨주며 말했다.


"너, 알바한다고 나랑 안 놀아주면 안 된다?"


그런 태형의 말에 잠시 몸을 굳혔던 정국은, 크게 웃으며 '그게 뭐예요!'하고 말했다.


"이건, 뇌물-."
"아휴-, 뭘 또 이런 걸 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장난기가 얼굴의 가득한 둘은, 서로 아는지 모르는지.
점차 닮아가고 있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몇 개월이 지났고,
둘은 여전히 학교 앞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먹었으며.
둘은 자주 휴게공간에 앉아 이야기를 했으며, 서로를 배려했다.

언제나 함께일 것만 같았던 둘은, 돌연 정국이 먼저 군대를 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에 별말 없이 학교를 다니던 태형은 1년 뒤 4학년이 되었을 때 돌연 군대에 가버렸다.


그렇게 시간은 1년 6개월, 또다시 1년이 흘렀고.


몇 년이나 보지 못하던 둘은 태형이 전역을 함으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서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둘이 자주 갔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만났고.


태형은 4학년, 정국은 3학년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진 점은, 태형은 더 이상 밤마다 울며 베개를 적시지 않았고.
짧은 텀을 두고 했던 수많은 연애를 그만두고, 정국이 알려줬던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 꿈을 찾았다.


정국은 더 이상 태형을 바라보며 초조해 입술을 물어뜯는 것을 그만두고, 태형이 선물했던 립밤을 발랐으며.
태형이 자주 마시던 사이다를, 가끔씩 사 마시며 그를 기억했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가성비를 자랑하는 돈가스가 놓여있었고, 둘은 침묵하며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동시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서로 변한 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한참을 웃던 그들은 서서히 서로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정국이 태형에게 말했다.


"다행이다."

"뭐가?"

"이제, 형 마음이 건강해진 것 같아서."


어렴풋이 지금 정국이 할 말을 알았다. 스스로 과거를 뒤돌아 보아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알겠는데, 곁에서 함께 있었던 정국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정국은 가기 전까지 마음이 건강해야 연애도 잘 할 수 있는 거라며, 그를 데리고 새로운 공기를 맞게 해주었었다.

잠시의 침묵 후 정국이 태형에게 물었다.


"아직도, 운명 같은 거 믿어요?"
"아니, 요즘은 그런 생각도 잘 안 하네."


서로를 마주 본다.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옛날과 같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고, 그에 정국은 작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형, 나는 어때요?"
"응?"
"나, 형 좋아해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
"이런 나는, 어떤 것 같아요?"


태형은 정국이 재능이 넘친다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 그만큼 노력하는 재능이다. 상대를 위해 노력하며 보이는, 그 사람의 본질. 이런 나라면, 형이 두려워했던 이별과 사랑도. 다시 해볼 만하지 않아요? 나는 형의 전 애인들처럼, 형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하고 말하는듯한 눈빛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진중하게 건네지는 좋아한다는 마음의 떨림은, 둘 사이에 커다랗게 떨어진 파장이 아니다. 잔잔히 퍼져간 사랑이라는 것일 뿐.

뜬금없는 말 일 수도 있지만, 타로에는 데스 카드가 있다. 해골 기사가 깃발을 들고 있는 카드. death, 그 말처럼 죽음을 의미하는 타드이지만, 떠오른 태양으로 인해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하는 카드이다. 함께 나오는 카드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카드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별을 통해 태형에게 새로운 시작이 찾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나도, 좋아해 정국아."




참고로, 그 카드는. 태형이 나중에 타로를 보고 가장 좋아하는 카드가 되었다.


이유는 뭐, 하나의 죽음은,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이기에.


하나의 이별은 곧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