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 월야

 

태형은 밤하늘을 사랑했다. 별도, 달도, 하늘에 떠있는 구름까지. 학교가 끝나고 이른 밤이 되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씩 사 먹으며 올라간 좁은 계단은 태형이 좋아하는 하늘이 잘 보였다. 달동네의 묘미였다. 까만 하늘에 보이는 저 달이 꼭 우리의 처지와 닮아 보여 다음 날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했다. 정확히는 나만 그랬다. 태형은 가끔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면 있는 팔각정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정국아. 넌 지금 행복해?

 

그 말에 너무나 쉽게 대답한 이유였을까. 거짓말을 했던 탓일까. 나를 힘들게 했던 가난도,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의 시선들도 날 좀처럼 행복이란 단어에 포함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 이라고 했던 나는 일주일 뒤부터 태형을 찾을 수 없었다. 너만 있어도 난 행복해.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줘. 내 말에 그가 슬며시 웃는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바보 같게도 따라 웃는다. 사실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김태형이 내게서 도망친 이유라는 것은 확신이었고, 확실이었다.


나는 달동네에 살았다. 허름하고 벽지가 울어서 울퉁불퉁 해진 집에 사는 나와 달리 김태형은 벽지가 운다는 표현조차 못 들어봤을 것이 뻔했다.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나는 평생 보지도, 하지도 못할 것들. 소위 말하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전학생 김태형은 소문이 많았고, 그런 사람이 돈이 없어 새벽까지 알바를 하다 다음날 학교에 지각해서 선생님께 엄청 혼나고도 잠만 자는 나를 찾는댔고, 정말로 찾아냈다. 그때 김태형과의 관계를 끊었어야 했다.


김태형은 자꾸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었다. 남들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길 행동이었지만 의심부터 하고 보는 나는 심각하게 여겼다. 재미만 보려고 저러는 건가. 먹튀? 아니면 이미지관리일 수도 있고. 뭐든 그땐 그게 싫었고, 위선 같았고,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마주치는 족족 피해다니기 일쑤였고, 그걸 또 걔는 찾아냈다. 이쯤되면 전정국 찾기 전문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근데 내가 좋아하게 될 줄 알았냐.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본인도 어이가 없었었다.


사랑에 빠진 루트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이다.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여름의 분위기도 한몫 한 것 같다. 음, 아주 많─이. 그렇다고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걔만 보면 심장이 멎으니 그건 절대 아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루트라고 할 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팔각정 앞 난간에 기대어 있는 그 애를 보았고, 마침 해가 발 밑으로 슬금슬금 자러 가고 있었고, 또마침 더운날에 느닷없이 시원하게 불어온 바람 덕분에 남고에서 말하는 첫사랑의 느낌을 단번에 알아챘고. 태형이 옆을 돌아볼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꼼짝 못했다. 너무 이뻤다. 꿈 같았다. 다음날엔 김태형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몸이 약해서, 서울에서 이쪽으로 온거거든. 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고. 나도 알 건 다 알거든. 편의점 삼각김밥이 1400원인 것도 알고 청소년 버스비가 1000원인 것도. 돈 많은 거, 명품 안 좋아해. 그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쫓아올 때부터 느꼈는데 역시 뭔가 특이하게 오해를 푼다. 지난 날의 나를 반성하며 오해에 대한 사과를 했다. 그 뒤는, 속전속결이었다. 급하게 고백하고 대답은 못 들었다. 김태형이 조금 아파져서 말이다. 일주일 뒤에 다시 학교에 나왔다. 대답은 여전히 못 들었다. 굳이 꼭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사랑하게 될 걸 알았던 것처럼 굴었다. 하교길엔 손을 진득하게 엮고, 해가 숨을 때면 어김없이 팔각정에서 야릇하게 혀를 섞었고. 이른 밤에 뜬 별을 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하루하루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다 눈치 하난 잘 먹은 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버린다. 김태형이 내게 사랑한다 해준 적이 있었나. 의심이 또 슬며시 피어올랐다. 다 연기면 어떡해. 무엇이 두려운지 모르겠다. 연기면 어쩔건데. 말했다시피 대답은 못 들었고 그냥 우린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러고 있는거다. 아슬아슬하게도. 조금은 힘들어졌다. 그래도 난 여즉 김태형을 사랑한다. 아, 생각만 해도 죽을 것 같다.

 


*
 


해가 떨어지는 이 시간 즈음에는 길거리와 차도, 식당에 사람이 많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제법 두꺼웠다. 두꺼운 패딩과 멋스러운 코트를 입고 각각의 식으로 나를 지나친다. 역 근처의 로데오 거리 한복판에는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이벤트들과 내 키의 세 배 정도 큰 트리가 세워져 있다. 믿는 종교는 없지만 크리스마스는 1년에 몇 없는 휴일이니 그것만큼은 예수께 감사했다. 방향을 틀어 집으로 가려고 했던 발을 다시 되돌려 놓는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예뻐 보였던 건지 로데오 거리의 분위기가 좋아 보였던 건지 내 두 눈동자가 연말을 기념하며 빼곡히 차 있는 사람들 속을 유영한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도, 재작년 연말 때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 분위기에 취해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아무생각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트리를 올려다만 본다. 화려한 트리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혼자는 나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트리를 바라보는 게 힘들어졌다. 그 애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에게 연말은 태형을 추억하는 시간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어서 날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내려 또 한참 동안 생각한다. 힘들다. 힘들어, 태형아. 보고 싶다. 짧게 추억을 한 뒤에 인파가 몰린 거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났다.


7년만에 태형을 만났다. 거짓말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김태형이 보였다. 만날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도 네가 보였다. 멍청하게 굳어서는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며 환영을 보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 너와 나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눈동자 속 젖은 바다는 나를 추억 속에 빠지게 했고, 그 추억 속에 빠진 나를 지독한 열병에 앓게 한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본 넌 아직도 우리가 철없던 시절의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 정말 나이를 먹지 않는 뱀파이어처럼 7년 전 내게 물어왔던 그때 그 얼굴을 하고서 나를 본다. 아니, 조금은 상한 것 같다. 7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추운 겨울에 얇은 츄리닝만 입고 있는 건지, 나는 너를 매일 그리워 했는데 그 동안 넌 날 안 보고 싶었던 건지, 왜 나를 떠난 건지∙∙∙ 오랜만에 만난 그와 할 말이 많았다.


곧이어 불안감을 느꼈다. 김태형이, 날 다시 떠나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그의 상실을 견딜 수 없다. 여기서 더 하면 정말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현실을 일깨운다. 내 옆을 떠난 김태형이 여기 왜 있겠어. 저기 보이는 김태형은 그냥 내 그리움이 만든 환영일 뿐이다. 이제는 태형이 눈앞에 보일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무시하고 발을 돌렸을 그 순간에.


“정국아.”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형이 웃고 있었다.


“나 좀 재워주라.”


속에 비친 그 슬픈 눈을 하고서도, 너는.


*


나는 김태형이 밉다. 너를 빼고 모든 것이 벅찼던 나를 두고 떠난 네게 화가 난다. 나를 그 지옥 속에 버린 네가 원망스럽다. 미움과, 분노와, 원망이 모여 나를 몇 년간 괴롭힌 탓에 나는 아직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자꾸만 우리가 행복했던 시간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너 때문에. 그렇기에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이라면 나는 아직 지옥 속에 있다는 것이고, 네가 정말로 내 곁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나는∙∙∙


“정국아!”


이름의 주인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떨며 불안해 했다. 태형이 내 어깨를 흔들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무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눈동자 속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아 더듬거리며 말을 피했다.


“어, 어? 아무것도 아냐, 왜?”


김태형은 아직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그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가 힘들어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뒤적였다. 김태형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다시금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정국아.”


희한하게도 웃는 모습을 볼 때면 눈동자를 이리로, 저리로 굴릴 수 없다. 김태형이 나를 안아주는 순간 내 생각회로는 모두 굳고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왼손은 등에서, 오른손은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이 형이 다 없애줄게. 김태형의 형 노릇은 날 울게 만든다. 나의 힘든 일은 곧 너 뿐이라. 그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거라면 너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이미 그럴 지도 모르고.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조각들을 애써 참아낸다.


“태형아.”
“응?”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
“우리, 데이트 하자.”
“∙∙∙응, 그러자.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그리고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이 밝았다. 물론, 내 옆의 김태형 빼고 말이다. 품 안에 들어와있는 태형의 몸이 집안의 따뜻한 온기와 맞지 않게 차가웠다. 혼자 밖에서 몇 시간동안 있었던 것 마냥 그렇다. 그래서 속으로 더 깊이 품었다. 조금만 더 안고 있자. 아직은 네가 사실인지 모르겠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아침은 태형이 좋아하던 김치볶음밥을 했다. 또한 가장 잘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요리쪽으로는 젬병인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게 그것이었다. 김태형은 크게 떠서 욱여넣더니 속을 가늠하기 힘든 눈을 하고 바라본다. 또, 저 눈. 태형이 옷이 없어서 내 옷을 빌려 입었더니 딱 맞던 무지티가 엉덩이 밑을 걸친다. 조금 이상하다. 너는 원래 나보다 키가 크지 않았니. 아직도 내 키가 자라고 있는 걸까.


현관 앞에 서 보니 벌써 시침이 12시를 향해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김태형은 내 옷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더니 알아서 마음에 드는 옷을 찾은 것 같다. 난장판이 된 방을 바라보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것으로 가득한 김태형이 사랑스러워서 무작정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없는 것으니 긍정이 표시라고 알고 놓지 않았다.


겨울이라서 추울 줄 알았건만 해가 쨍쨍해서 그런 탓인지 봄이 오는 것 같았다. 말도 안돼, 12월에 무슨 봄. 아까까진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손도 따뜻했고 날씨도 따뜻하니 기분이 좋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맞는 평화였다.


“정국아 우리 사진 찍자.”
“사진? 어디?”


태형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부스가 하나 있었다. 이게 뭐야. 들어가보니 작은 선단에는 악세서리가 놓여 있었고 정면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이거 그 네컷사진 찍는 거 아니야? 이거 해보고 싶었어? 이런 거에는 문외한이라 처음 보는 기계를 마주한 나는 어떻게 하는 지 몰라 헤멨는데, 김태형이 옆에서 슥슥 뭘 만지니 막 호들갑을 떨면서 빨리 찍자고 그런다. 사진과는 덤덤한 사이라 어색한 포즈를 지으니 다 나온 사진 보고 태형이 울상을 짓는다. 한번 더 찍기로 했다. 두번째는 막무가내로 입을 대었다. 대성공이었다.


점심은 패스,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우리는 꼬르륵 소리를 듣고 나서야 발을 멈추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높은 빌딩에서 바라본 도심의 야경도 제법 볼 만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볼을 붉히며 낮에 몰래 샀던 싸구려 반지를 건넸다. 싸구려 반지도 반지라는 건지 겉보기엔 고급지게 만들어진 반지케이스가 명품 같았다. 무슨 대답을 할까 기대를 했는데, 정말로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걸 왜 나한테 줘.”
“∙∙∙어?”


뒤통수를 한 대 빡, 세게 맞아서 멍했다. 넌 또 아침의 그 눈빛을 하고 날 바라본다. 싸구려라 맘에 안 드는 걸까. 조심스레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생뚱 맞았다.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더 좋은 걸로 해서 줘.”
“뭔 소리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넌데.”
“근데.”
 
나는 너, 
안 좋아해.


이번엔 말그대로 와장창 깨져버렸다. 7년 전 대답을 지금 들었다. 긍정이 아니었던거다. 심장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지금 바로 기절한다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이 답답해 숨 쉬기가 힘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는 데 직원이 다가와 흐름을 끊었다. 우리 둘 사이 관계도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갈 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좋았던 손도 안 잡고. 안 좋아하는 사람들의 거리만큼 유지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와서는 피곤하니까 내일 얘기하자고 마침표를 찍었다. 방문을 쾅 닫고 들어서니 더 답답해서 창문을 열었다. 깨진 마음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이건 김태형의 잘못이다. 이제야 너를 믿어보려 했는데. 네가 진짜인 걸 알았는데.
 


*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전해야할 시간이었다. 비록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걸로 나는 충분했다. 돌아가면 정국이를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널 만났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에서의 말은 의도는 아니었지만 극단적으로 나와버렸다. 내가 없을 네가 고통스러워 하는 걸 조금이라도 막아보기 위해 그랬지만, 오히려 더 상처가 되어버렸을 걸 안다. 그래서 예정도 없었던 마지막 말을 하려 한다. 곤히 잠들어 있는 정국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빛 삼아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천천히 바라본다.


언제 이렇게 컸냐, 정국아. 예전엔 잘생긴 거 빼고 봐줄게 없었는데 요즘은 잘생기고 돈도 잘 벌고 잘 컸네. 나 없이도 잘 살았어. 이제 다른 사람 만나서도 잘 할 수 있겠다. 근데 내가 잠깐 내려온 거거든. 잠깐이래도 너무 짧은 거 아닌가. 우리 정국이 사랑해주려면 100년도 모자란데 말이야. 아까는 정말 미안해. 내가 조금 미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와버렸네. 사실 그거 아닌데. 진심 하나도 없었는데.


말을 하고 있는데 기운을 알아챈 건지 정국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내 이름을 중얼거린다. 괜스레 눈물이 난다. 혹시 악몽을 꾸고 있니. 그 악몽을 준 게 나 일지도 모르겠네. 정말 나쁜놈이다 나.


“정국아. 눈 좀 떠 봐.”
“......태형아...?”
“응. 나 태형이.”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왜 이제야 왔어...”
“미안해, 정국아. 늦게 와서 내가 정말 미안해.”
“왜 울어... 나 괜찮아. 그럼 우리 이제 사랑하는 거 맞지...?”


맞지. 맞아. 나는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어. 네가 날 피할 때도, 노을 속에서 날 뚫어져라 쳐다봤을 때도. 고백할 때는 정말로 답을 해주고 싶었어. 결국 안 했지만. 어쩌면 난 우리가 절대로 좋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몰라. 네가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마다 가슴이 아렸어. 그 때 말 못한 건 미안해. 그게 네 악몽이 되어버린 것도 미안해. 나 정말 나쁘다. 이렇게 말만 하다 가면 또 네 악몽 속에서 내가 등장하겠지. 그것도 미안해. 그냥, 나를 만나게 해서 미안해. 정국아. 그리고 사랑해. 줄곧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전하게 됐네. 사랑해, 정국아. 난 그곳에서 항상 널 사랑하고 있을거야. 이렇게 널 두고 가는 나는 나쁜 애인이 되겠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사랑해∙∙∙.”


태형은 매트리스에 눈물 한 방울만을 남기고 달빛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떠나간 자리엔 이제 악몽을 꾸지 않는정국이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
 


“야! 일어나 봐, 전정국 야 인마!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두면 어떡하냐!” 
“뭔, 윤기 형∙∙∙?”
“니 어제부터 갑자기 잠적했길래 겁나게 뛰어왔다. 또 뭔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을까봐. 근데 지금이 몇 시냐? 얼마나 피곤했으면 잠을 한나절을 자?”
“오랜만에 악몽 안 꿔서∙∙∙ 태형이는요?”
“뭔 소리야. 아직도 잠 안 깼어? 김태형이 여기 왜 있어.”
“형이야말로 뭔소리에요. 어제까지 나랑 같이 있었...는...”


정국이 벌떡 일어났다. 온 집안을 뛰어다녔지만 태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닌데... 나랑 어제 사진도 찍고 밥도 먹었는데. 윤기가 정국을 불러세웠다. 야, 너 꿈꾸냐? 정신 차려. 여기 꿈 아니야. 꿈... 어제 김태형이 사랑한다고... 꿈에서 말했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다고 말해줬다고요. 나한테. 정국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태형이 떠났다. 아무도 태형이 나랑 같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사랑한다고만 말하고 가버렸다. 나한테 왜그래. 사랑한단 말할 기회도 주지도 않고. 네 할 말만 하면 나는 서러워서 어떡하는데. 정국이 주저 앉았다. 윤기는 7년동안 봐왔어도 적응이 안되는 모습에 정국을 안고 토닥였다. 왜 신은 이 가여운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거냐고. 이정도 괴롭혔으면 이제는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태형아, 난 널 잊고 싶지 않았어. 내 꿈속에서 너는 항상 나한테서 멀어지는데도 나는 아픔과 절망을 견뎠어. 퇴근길의 버스에서 학교 앞을 지나갈 때마다 옆에서 네 목소리가 들려오는데도 꿋꿋이 버텼어. 그렇게 계속 널 내 순간 속에 지니려고 했어. 이제 다 함께 했었던 형들도 네 얘기를 꺼내질 않아서. 나까지 잊으면 너는, 흑백으로만 남아버릴까 봐.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널 잊으래. 점점 망가져 가는 나를 보고 소리를 질러. 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 당장이라도 네가 나한테 달려올 것 같은데 난 너를 받아줄 수가 없어. 이건 내 잘못이야. 널 잊을 수 없는 것도, 널 잊어야 하는 것도, 널 받아주지 못하는 것도 다 내가 못해서 그런 거야. 내가 어떻게 너 없이 살아갈 수가 있어. 그건 정말 나쁜 거야. 잔인한 거야. 그런데 너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널 만나서 없는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내 심장을 왜 갈기갈기 찢어버려. 왜 절벽 끝을 붙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내 손을 잡아주는 척 떨어뜨려∙∙∙ 너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어디 갔어 김태형....”


형, 김태형, 나의 김태형. 수없이 많았던 너의 또 한 번의 상실이다.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마지막의 상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