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름에게 ━ 모국

 

엄마는 특별한 날에만 사과파이를 만들었다. 오븐에 구운 사과에선 그을린 시럽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파이 시트가 구워지는 동안 집안 공기는 온통 고소하고 향긋하게 물들고 더불어 벽에 걸어둔 옷감 사이사이에 잔향처럼 캐러멜 냄새가 배곤 했다.

 

학교에서 막 귀가한 태형은 대문 앞에 서자마자 갓 구운 파이의 존재를 예민하게 눈치챘다. 가족 중에 오늘 생일인 사람이 있었나? 언뜻 떠오른 의문을 뒤로 하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정원 한켠에 아직 식재 시공이 끝나지 않은 뗏장과 흙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심은 잔디 가운데 임시로 설치한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태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물줄기를 피해 겅중겅중 뛰며 잔디를 가로질렀다. 퍽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다. 이따금 튀어오른 물방울에 군청색 교복이 짙게 젖었다.

 

"엄마!"

"아들 왔어?"

"너무해. 내가 하교시간 맞춰서 스프링클러 꺼달라고 했잖아요."

 

무얼 하느라 바쁜지 나와보지도 않는 엄마를 향해 볼멘 목소리로 항의해보지만 대꾸가 없다. 울컥해서 뭐라 더 툴툴거리려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마지못해 관뒀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태형은 잠시 현관에 서서 머리카락에 묻은 물을 익숙하게 털어냈다. 물세례를 맞는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제법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간에 기대어 운동화를 벗었다. 신발 코가 문쪽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정리해두는 건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 젊은 시절 수년간 일본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아버지는 남들이 신경쓰지 않는 사소한 부분에 예의를 차렸다.

 

엄마는 예상대로 부엌에 있었다. 출입구를 등지고 서있어서 뒷모습만 보였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였다. 밀가루며 설탕, 버터, 조각난 사과 등의 재료가 조리대 위에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태형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일단 목을 축인 뒤 너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두어차례 시도 끝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엄마가 마침내 꿈에서 깨듯 천천히 태형을 돌아보았다.

 

"학교 잘 다녀왔어?"

"네. 그보다 갑자기 웬 파이예요?"

"아까 백화점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마침 오늘이 아들 생일이라길래 축하나 해줄까 했지. 여기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입원해있다니까 이따 같이 병문안 가자."

"병문안? 아프대요?"

"본인이 아니라 아들이 아프대."

 

백혈병 비슷한 거라고 엄마는 말문을 열었다. 이어 가련한 그집 아들의 유년기에 대해, 또 모친의 헌신에 대해, 질병의 잔악함과 끈질김에 대해, 모자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질문 하나에 누군가의 치부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수십 개씩 줄줄이 딸려나왔다. 우연히 만난 것 치곤 개인적인 사정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거 아냐? 태형은 이야기를 들으며 바구니 속 알이 굵은 사과 한 개를 집어들었다.

백혈병이면 백혈병이고 아니면 말 것이지 '백혈병 비슷'한 건 또 뭐란 말인가. 무신경한 화법에 넌더리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린 탐스러운 사과를 와작 베어물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대체로 간결하고 재치있게 말하는 편이었으나 가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지리멸렬한 문장을 쓸 때가 있고, 그래서인지 종종 의도치않은 말실수를 했다. 그것 또한 아들로선 미워할 수 없는 개성이었다.

 

"걘 몇 살인데요?"

"열 여섯. 너랑 두 살 차이야."

"이름은요?"

"음... 뭐였더라..."

 

타인의 비극이란 이런 식이었다. 곳곳에서 수런거리기엔 더없이 좋아도 세부사항까지 기억하기엔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때마침 오븐에서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경쾌한 알람이 울린다. 동시에 엄마가 다소 높은 음성으로 외쳤다. 아 맞다! 생각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모든 이름에게

 

모국

 

 

 

 

 

 

전정국.

모든 이름의 시작.

 

엄마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정국은 투약을 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애는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격리병실 침대 구석에 환자복처럼 조용히 구겨져 있었다. 치료의 후유증 때문인지 거동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 보였다.

태형은 병실 문에 난 작은 창을 통해 간신히 정국을 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엎드려 있어서 끝내 얼굴은 보지 못했다. 말려 올라간 환자복 아래 앙상한 팔과 볼품없이 불거져 나온 무릎이 눈에 띄었다.

 

"정국인 못 나와요?"

"으응. 아직 면역력이 약해서..."

 

오랜만에 찾아온 방문객이 반가운지 정국의 모친은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초조한듯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자리에 남겨둔 이에게 마음이 쓰여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취식공간은 허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일 당사자인 정국이 보호격리 중이라 별 수 없이 건강체 셋이서 파이를 나눠 먹었다.

정국이 황량한 병실에 혼자 격리되어 있는 이유는 세상이 너무 ‘더럽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감수성이 높은 환자를 역으로 격리하는 걸 역격리라고 한다고. ‘더럽다.’ 왠지 태형을 멋쩍게 하는 말이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겠지만. 어디에나 상재균이 존재하고 대부분의 사물 표면은 지저분하다는 단순한 표현이겠지만 그냥 어쩐지 말이다.

 

“지금은 저렇게 누워있지만 정국이는 창 밖을 보는 게 취미야. 특히 노을 보는 걸 좋아해.”

“언제쯤 퇴원할 수 있어요?”

“글쎄… 아직은 기약이 없네.”

 

정국은 과연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길까?

조금 식어 딱딱해진 파이의 표면을 포크로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으로 통하는 나조차 가끔은 살아있는 게 낯선데, 하물며 창 하나로 바깥과 교류한다면 괴롭지 않을 리 없다. 종종 삶 자체에 낯을 가리는 태형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생일인데도 살을 만지고 온기를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한, 고립된 한 사람을 구출할 방법에 골몰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정국은 이전과 같은 자세로 접혀 있었다. 태형은 창 너머 굽은 등을 지문을 쓱쓱 쓰다듬었다.

 

이튿날부터 태형에겐 없던 버릇이 생겼다.

하굣길에 병원에 들러 듬성듬성 불 켜진 병실을 올려다보는 버릇이다. 날이 갈수록 저녁이 길어지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면 환자인지 보호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창가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태형은 이러한 일련의 시네마틱 시퀀스 같은 장면을 병원 벤치에 앉아 응시했다.

한참 기다리면 3층 창가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정국은 유리창에 코끝을 붙이고 밖을 본다. 열지는 않고 보기만 했다. 거리가 멀어 이목구비가 명확히 보이지 않아도 대략적인 병실 위치를 고려하면 정국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한번 본 적도 없는 태형을 알겠냐만, 첫날은 창가에 얼굴을 드러낸 정국을 보고 당황해 숨으려 했다. 시간이 갈수록 뻔뻔해져 지금은 조심스레 손을 흔들 때도 있었다. 눈이 마주치거나 인사를 되돌려받은 적은 없다.

이상한 고집이었다. 태형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논리적인 근거도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마치 짝사랑하는 로미오라도 된 양 매일 찾아가는 꼴이 그랬다. 호기심인가 하면, 호기심보다는 연민이다. 아니, 연민이라기엔 오만하다. 차라리 소리 없는 응원에 가까웠다. 태형은 사진을 통해 정국의 얼굴을 익히고 엄마가 전하는 소식을 통해 정국의 신변잡기를 파악했다. 정국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나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걸로 충분할 줄 알았다.

 

태형에게서 그늘을 보는 사람은 좀체 드물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기본적으로 태형은 밝고 장난기가 많아 어렵지 않게 사랑받는 성격이었다. 진중하지 못한 태도도 한 몫 했다. 무람없는 말투와 넉넉한 가정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태형을 철부지 응석받이 쯤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꽤나 잘빠진 외모 덕에 성장과정에서 넘치도록 받아온 애정 세례도 빼놓을 수 없었다. 대인관계는 원만했으며 발이 넓고 두루 교류하기를 즐겼다.

다만 태형은 늘 외로웠다. 겨울에 핀 꽃처럼. 예고없이 내린 소나기처럼. 낯선 도시의 어린아이처럼. 태생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무엇처럼 못 견디게 외로웠다. 계기나 이유 따위가 없는 순수한 감정이었기에 태형의 외로움은 후천적 결핍의 산물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외로웠고 존재 자체로 당위성을 지닌 사람. 태형은 단지 그런 사람이었다.

구겨진 환자복 같은 사람. 매일 해가 지는 시간에 유리창에 코끝을 붙이고 밖을 보는 사람.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이제 태형은 정국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백혈구 수치 감소로 잦은 입퇴원을 반복하던 정국이 마지막으로 퇴원하던 날 태형은 엄마와 함께 그 병실을 다시 찾았다.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한 엄마 덕분이었다. 어느새 계절은 겨울의 길목으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첫 병문안 때까지도 아직 여름의 신록이 남아있던 가로수 밑둥에 낙엽 무덤이 쌓여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싸늘해 어깨를 움츠리고 걸어야 했다. 수속을 마친 뒤 태형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제 것이 아닌 짐가방 두 개를 트렁크로 날랐다.

정국은 예상보다 더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사람 간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 첫 만남(태형으로서는 구면이었지만)에 태형이 인사차 악수를 하기 위해 내민 손도 거부했다. 퀭한 눈매와 버석하게 마른 피부는 오랜 투병으로 인한 고생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태형은 재빨리 악수를 거두고 긴장인지 민망함인지 모를 감정으로 인해 손바닥 가득 흥건히 스민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의외로 정국은 태형만큼이나 키가 컸다. 준중형에 불과한 작은 차체 옆에 서있으니 더 커 보였다. 괜히 제가 작아지는 기분이라 태형은 얼른 조수석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국은 불현듯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는 말을 꺼냈다. 다음은 없을 거라고도 했다. 선언하듯. 만져질 것처럼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정국의 모친이 울기 시작했다. 터진 울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백미러로 본 정국의 표정은 무심했다.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태형은 지금까지 들었던 정국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흰 피부와 검은 머리칼, 동그랗고 큰 눈, 왕자님 같은 예쁜 외모, 사고뭉치, 천방지축 망아지,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는 장난꾸러기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뒷좌석의 정국은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파리하게 마른 몸에선 소독약 냄새가 났고 낯빛은 어두웠다. 어쩌면 전혀 웃지도, 울지도 않을 사람 같았다.

 

태형이 지금까지 사랑받았던 이유는 애정에 갈급증을 보이지 않는 태도에 일정부분 기여했다.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되 사랑스럽게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형의 본성이자 본능이었고 생존방식이었다. 그러나 정국은 그런 태형에게 한 톨의 관심도 주지 않았고, 어쩌면 태형은 전략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어째서 정국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태형 자신도 알지 못했다. 태형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평범한' 친구들이었다. 모나지 않은 성격에 대체로 행복하고, 가끔 우울해하기도 하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소란스럽게 보내고, 유쾌한 농담을 즐기고, 관심을 모으려다 선을 넘기도 하고, 우는 일보다는 웃는 일이 많은 애들. 그런데 이상하게 태형은 정국에게 마음이 갔다. 강퍅하고 공통된 화제도 없고 지나치게 낯을 가리는데도 그랬다.

 

“태형이 네가 정국이 좀 챙겨줘. 너 어차피 집에선 공부 안 하잖니.”

 

정국은 학령기 전에 발병한 혈액암으로 투병하느라 학교를 경험할 새가 없었고, 이후에는 관해와 재발이 반복되어 완전히 홈스쿨링으로 전환한 상태였다. 정국의 부모님은 작은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하루종일 바쁠 때가 많았다.

공교롭게도 이사온 집 근처에 정국의 집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제게는 말도 없이 갑자기 전원주택으로 이사오게 된 배경이 무엇일지 떠올려보자 답이 나왔다. 전학을 가기에는 애매한 시기. 너무 먼 등교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이사를 강행해야 했던 이유.

 

“주변에 친구가 거의 없대. 두 살 차이면 거의 친구니까 사이좋게 지내렴.”

 

두 사람이 사는 한적한 주택가에 거주하는 인구특성상 은퇴한 노부부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파트 밀집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근처의 또래는 서로뿐이었다. 이용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미리 알았다고 해도 별 도리 없었을 것이다. 하교 후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이제는 정국의 집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달라진 점은 앞으론 한 공간에서 정국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일은 참 알 수 없구나. 중얼거리자 어쩐지 더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태형은 아직 정국이 조금 어려웠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사실 단 며칠만에 적응했다. 반복되는 루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서는 매번 같았다. 대문 앞에서 차임벨을 누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잠금쇠가 풀린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도달하면 기다리고 있던 정국이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가만 서서 신발을 정리하는 태형을 물끄러미 본다. 눈이 마주치면 정국이 먼저 몸을 틀어 방으로 향한다. 태형은 그 뒤를 졸졸 따른다. 정국이 눈짓으로 어디든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면 태형은 침대에 걸터앉거나 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리고 한두 시간 정도 그저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장난을 걸거나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정국의 반응은 불가해의 언어를 들은 듯이 조용히 태형을 응시하는 데에 그쳤다. 민망해진 태형은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으로 뺨을 슬슬 긁기나 했다. 곧 침묵에 익숙해졌고 애써 말을 걸려는 노력도 시들해졌다.

태형이야 하릴없이 멀뚱거려도 거리낄 것 없었으나 정국은 할 일이 많았다. 보통 홈스쿨링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등 생산적인 일을 했다. 열여섯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의젓한 모습이었다. 때때로 정국은 아주 어린 소년처럼 보였고, 어떨 때는 다 늙어버린 노인처럼 보였다. 실제 나이와 어른스러운 태도의 괴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형은 못내 심심할 때면 전날 정국이 읽던 책을 기억해뒀다가 다음날 책장에서 꺼내 읽어보기도 했는데, 한국말이지만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태반이었다. 

 

“설마 울어요?”

 

태형이 드나든지 한 달쯤 된 시점이었다. 아마 정국이 먼저 말을 건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뭘 보는데 울고 그래요? 정국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다가왔다. 어어 오지마. 오지마! 뒤늦게 외쳐보지만 정국은 이미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만화책?”

 

꺅! 당황한 나머지 태형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냅다 던져버린 태형이 변명하듯 허공에 손사래를 쳤다. 그, 오, 오해야!

정국이 바닥에 떨어진 만화책을 주워올리며 물었다.

 

“표지가 체 게바라 평전인데...?”

 

실로 난감했다. 졸지에 정국을 속인 셈이 됐잖은가. 맞지만. 아니 그래도.

속임수는 간단했다. 알맹이는 소년만화인데 껍데기만 체 게바라 평전으로 바꿨다. 사실 이번 한번이 아니었다. 말없이 도 닦는 선인 마냥 앉아있다가 안녕 한 마디를 남기고 나오는 데 지쳐서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들고 왔던 책이 시초였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군주론', '사피엔스', '자기만의 방' 등등... 당대의 명저서를 포함한 다른 표지도 많았다. 심사숙고하여 커버를 선정한 태형의 시점에선 열혈 고교 배구만화나 거인을 구축하는 만화도 고전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 명저서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했다고나 할까... 그런 시답잖은 이유였다. 아무튼 당황스러웠다.

 

“커버를 바꾼 것도 웃긴데 이걸 보고 울고 있었다는 게 더 웃겨요.”

 

정국이 어느 틈에 찾았는지 한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며 피식 웃었다. 막 거인의 입안에 투입 중인 주인공이 보였다. 무릎 아래로 다리가 동강나 있었다. 꺅! 태형이 재차 비명을 울리며 눈을 가렸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귓가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목석 같던 정국이 무방비하게 웃고 있었다. 정국이 웃자 눈매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졌다. 동시에 광대가 봉긋하게 올라붙고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손가락 사이로 관찰하던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그를 웃게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데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정국은 지금까지 태형이 감시역으로 온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무슨 소리냐며 난 그런 사람 아니라고 펄쩍 뛰자 조금 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날 정국은 태형이 가져온 만화책을 전부 읽었다. 헤어질 땐 재차 다음권을 가져오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가까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시절의 우정은 사랑을 닮아 있었다. 비단 태형과 정국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태형은 결코 우정을 사랑으로 치환하고 싶지 않았다. 보나마나 괴로울 것이 뻔했다. 그러나 정국에게 태형은 하나뿐인 친구였고,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가 제공하는 무한한 애정을 독식할 수 있었다. 맹목적인 마음이 주는 충만감은 지금껏 경험한 무엇과도 달랐다. 거부할 수 없었다.

태형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했고, 자주 몸의 일부를 정국과 겹친 채 누워있곤 했다. 혈관이 도드라진 흰 피부 위에 가무잡잡한 태형의 다리가 얼기설기 걸쳐졌다. 정국은 겨울에도 체열이 높아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마치 온몸에 심장이 있는 듯했다. 신체 어느 부위에 닿아 있어도 세찬 박동이 느껴졌다. 한겨울이 되자 수족냉증이 있는 태형은 뜨끈한 살덩이에 더욱 엉겨붙었다. 외출했다 돌아오자마자 여상하게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시린 손에 정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질색했지만 정작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 무렵 정국의 키가 태형을 따라잡았다.

 

태형은 내성적인 정국이 좋았다. 장난을 치면 따라하진 못해도 장단 맞춰주는 배려심이 좋았다. 실수해도 면박주지 않는 다정함이 좋았다. 과묵하고 진중한 면이 좋았다. 아픈 걸 묵묵히 견디는 자존심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태형을 덮어놓고 따르는 게 흡족하고 기꺼웠다.

태형은 진심으로 정국을 좋아했다. 또한 정국도 저를 좋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다. 음험하고 불온한 생각이었다. 태형은 정국이 영원히 외로웠으면 했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태형은 벼슬 중의 벼슬이라는 고 삼이 되었다. 병원을 들락날락 하던 정국은 그 사이 다시금 완전관해 판정을 받았다. 그 말은 당분간 안심해도 된다는 소리였다.

여름이 되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태형은 관계의 진척을 원했다.

 

“다 나은 거 아냐?”

 

어지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태형이 삐죽하게 말했다. 습관처럼 볼뽀뽀를 하려던 태형을 무심코 피한 정국은 당황한 얼굴로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맞아요.”

“근데 왜 피해?”

“그냥… 습관이요. 그리고 이전에도 다 나았었어요.”

“피하지마. 나 상처받아.”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태형의 이유 없는 스킨십에도 면역이 생겼다. 마음 놓고 정국을 만질 수 있게 되자 태형의 조급증은 한층 가신 듯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수험생인 태형은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고 정국의 집에 들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태형이 오지 않으면 정국은 극도로 불안해했다.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태형이 관계의 진척을 원하는 만큼 정국은 손에 잡히는 확실한 것을 원했다.

 

어느 초여름 밤. 정국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이 난다고, 그런데 부모님이 늦을 것 같으니 형이 와주면 안 되겠냐는 말이었다. 정국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정국은 멀뚱히 현관에 서있었다. 아파서 누워있다고 해서 죽이랑 약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전속력으로 달려왔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따위 장난을 치려고 바쁜 고 삼을 불러냈냐며 태형은 무섭게 역정을 냈다. 정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성을 내던 태형이 제풀에 지쳐 돌아설 때까지 어떤 변명도 핑계도 대지 않았다. 태형은 가져온 짐보따리를 쾅 내려놓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밖은 바람이 불어 을씨년스러운 가운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태형은 우산이 없었지만 다시 들어가 우산을 달라고 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차양 아래 서서 보다가 한발 내딛는데 뒤에서 덜미를 붙잡혔다.

 

“젖잖아요.”

“…...”

“기다렸다 가요.”

 

그렇게 말하는 정국의 목소리가 더 젖어 있었다.

 

“…자고 가면 더 좋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인다. 손에 만져질 듯한 긴장감이 대기에 맴돌았다. 태형은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엄마. 아니 그게… 나 오늘 정국이네서 자고 갈게.

사람 사이에 이해라는 게 있을까?

그래봐야 조금 더 정확한 오해와 부정확한 오해가 있을 뿐, 사실 이해라는 건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 아닐까?

태형은 축축한 어둠 속에서 정국에게 안겨 생각한다. 정국을 이해하고 싶다. 정국에게 종속되고 싶다. 정국을, 이 아름다운 인간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정국이 다시 입원하게 되면서 이 모든 바람은 송두리째 깨지게 되었다. 40도가 넘는 고열이었다. 신열 때문에 뇌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태형은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자려고 누울 때면 정국의 뇌가 얼음처럼 녹아버리는 악몽을 꿨다.

 

“예전처럼 오랫동안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대요.”

“내가 옆에 있을게.”

“그럴 필요 없어요.”

“정국아.”

“형은 그냥 외로운 것뿐이야.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태형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렸다가 이내 닫아버렸다. 정국을 이해하고 싶다. 정국에게 종속되고 싶다. 정국을 사랑하고 싶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앳된 목소리를, 실핏줄까지도 비치는 흰 피부를, 예민한 성정과 빈말은 절대 못하는 올곧은 성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성품을.

 

“형이 하루라도 안 오면 나는 괴로워 미쳐버리겠지. 그리고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형이 나한테 흥미가 떨어진 건 아닐까, 형을 다시 못 보게 되며 어쩌지 생각하겠죠.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돼.”

 

이 사람은 누구인가.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살고 싶지 않아요.”

눈앞의 정국이 아득히 멀었다.

 

정국은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태형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몹시 성실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정확히 태형이 사랑했던 방식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정국이 묘사한 자신은 그러했다. 살아온 궤적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이 정도의 간단한 문장으로도 충분했다. 오랜 투병과 그에 따른 관계의 부재, 잦은 이별로 인해 정국의 인간관계는 구멍투성이였다. 애초에 의지를 가지고 영위해나가는 삶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정국의 생은 뿌리 없이 부유하는 식물처럼, 천공의 섬처럼 고요히 배회할 뿐이었다.

정국이 아는 모든 외로운 어린이들은 자라서 외로운 청소년이 됐고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국은 종종 침대에 누워 기억나는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외로운 청소년들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까' 생각했다. 여전히 외롭거나 혹은 이상하거나. 어쩌면 아주 슬프거나 우스꽝스러운 어른이 돼있을지도 모른다. 정국은 아이들의 결말이 궁금했다. 물론 끝을 알기 전에 사라진 아이들도 몇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느 한 순간 증발해 흩어져 버렸다. 먼지보다 가볍게. 가능하다면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을 정도로 이상적이었다.

 

정국은 남은 날이 더 많은 태형의 인생이 자신의 실로 꿰어지길 원치 않았다. 비록 앞으로 제 인생이 태형의 실에 여러차례 관통된다 한들 그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함께 겪은 여름의 열병은 둘의 사이를 뿌리부터 바꾸어 놓았다.

온전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그를 소유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분리감과 그로 인한 상실감. 상대와 내가 완전한 타인이라는 사실. 이런 박탈감을 극복하고 일치감을 얻고자 노력하는 게 사랑의 과정이 아닌가. 태형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짐작보다 몇 천 배 어려웠고 태형은 잘 소화해낼 수 없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병실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날 태형은 최초로 구역했다. 다음 날 신약 치료를 받기 위해 정국이 병원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정국의 흔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래 울어 나올 눈물이 없어지자 체하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겨울에 핀 꽃. 예고없이 내린 소나기. 낯선 도시의 어린아이... 그건 정국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무엇이었다. 문득 정국의 모친이 자꾸 뒤돌아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정국은 평생토록 태형을 뒤돌아보게 할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몹시 추웠던 그 해 겨울과,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보냈던 폭서, 그리고 차라리 익사를 꿈꿨던 장마까지.

태형을 더이상 태형이 아니게 만든 계절들이 지나고 있었다.

 

-

 

태형은 오래 방황했다.

되도록 이름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억지로 지우고 싶진 않았지만, 떠올리면 가슴이 메여 도무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형체 없는 폭풍우 같은 정동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예상보다도 훨씬 더 촘촘하고 견고한 노력이 필요했다. 태형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성마른 들개처럼 쏘다니며 마른자리건 진창이건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렀다. 멀미 같은 상사였다. 온통 어지럽고 속이 뜨거웠다. 닥치는대로 사람을 만나고, 짧게 순환하는 연애를 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태형은 도저히 정을 붙일 수 없었던 학교를 관두고 새롭게 들어간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다. 오디션 때 가벼운 코미디를 준비해 극찬을 받았으므로 비슷한 종류의 연기를 하게 되겠구나 생각했지만, 실제로 태형이 주로 접하게 된 대본은 부조리극과 사회풍자극이었다. 손쉽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된통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누군가 말한대로 그냥 외로웠던 것일지도 모르지. 단순히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거면 뭐라도 괜찮았는지 모른다.

정기모임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진행되었다. 실제로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건 학기중에는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평소에는 회장 주도 하에 극본을 고르고 시청각 자료를 감상한 후에 참고한 점을 토대로 연습해보거나 양질의 연극을 관람하러 다녔다. 개인적으로 소그룹을 만들어 무대미술이나 연출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태형의 경우 하고많은 날을 연습실에 퍼질러져 술을 마시는 데에 낭비했다.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인 척하는 건 쉬웠다. 필요한 건 단지 적당한 술기운과 미지근한 대화. 애매한 거리의 타인. 너무 밝게 빛나는 것들은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피했다. 태형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민하게 반응했으며, 선명한 웃음소리와 데일 듯한 체온을 만나면 가능한 가장 멀리 도망쳤다.

따라서 정국은 무조건 태형에 있어 대척점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연출을 가장한 조명팀이자 음향팀이었다. 아무나 각본가와 연출가가 될 순 없었다. 인원 수가 적으니 신입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스탭이고 배우가 돼야만 했다. 지원한 분야에 배정되지 않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태형과 같은 기수에 신입으로 들어온 정국은 남들보다 건장한 체격을 이유로 무거운 조명과 음향설비를 관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남들 다 피하는 궂은 일을 하면서도 별달리 불평불만이 없어 회장단은 덮어놓고 정국을 좋아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태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저 눈만 마주쳤는데도 순식간에 전신의 모골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아주 불온하고도 선뜩한 기시감이었다.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카락. 대충 걸친 져지. 의외로 수더분한 성격.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예뻤다. 반면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매사에 무관심해 보였는데, 태형을 볼 때만 안광에 이채가 돌았다. 그러면서도 절대 말은 걸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태연하게 넘기고 싶었는데 무시하는 것도 여간하지 않았다. 내리쬐는 조명처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비추는 시선을 받고 있으면 관자놀이에 땀이 고이고 입에는 침이 고였다.

 

그해 여름은 힘겨웠다.

태형은 동아리 가을 정기공연에서 생애 첫 연기에 도전하게 됐다. 연출가인 회장의 졸업 전 마지막 공연이라는 이유로 그가 직접 쓴 부조리극을 상연하기로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해하기 힘든 대사를 외워서 말해야 했고 설상가상 감정을 실으라는 짜증스러운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태형이 맡은 역할은 대기업을 은퇴한 아버지와 함께 취업 준비를 하는 만년 취준생 아들 역할이었다. 논리가 철저히 배제된 언어를 사용하여 인물간 단절과 고립을 유도하고 갈등이 고조되길 기계적으로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른 것처럼 갑자기 극이 끝나버린다. 황당했다. 차라리 음악에 맞춰 격한 춤을 추거나 신라시대 화랑을 연기하는 편이 태형에게는 유익할 듯 싶었다.

여름방학 중 꼬박 한 달을 꼼짝없이 연습에 발이 묶였다. 8월초가 폭염의 절정일 줄 알았건만 공연일이 다가올 수록 날은 더 더워졌다. 냉방이 약한 연습실에 옹기종기 모여 짜장면 따위를 먹으며 연습을 하니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내렸다. 그러나 태형은 늘 그래왔듯 온힘을 다해 버텼다. 제아무리 힘들어봐야 어차피 지나갈 테니 매양 성실히 임하는 것만이 태형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였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조명을 든 정국도 버티고 있었다. 정국은 때로 흔들리는 태형에게 조명보다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잘하고 있다는 위로의 제스처인지 아니면 잘 좀 하라는 경고의 제스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공연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아침공기가 소슬하니 맑았다. 태형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무대에 올랐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기에 임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공연을 마치고 내려왔다. 보낸 이 없는 작은 수국꽃다발이 대기실에 걸어둔 자켓 주머니에 비뚜름하게 꽂혀 있었다. 태형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꽃대 사이에 Light man이라 적힌 카드가 숨겨져 있었다. 위로였구나.

 

뒤풀이는 동네 치킨호프에서 진행되었다.

튀긴지 좀 되어 눅눅해진 치킨과 탄산이 부족해 밍밍한 맥주로도 축제의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붕이 무너질 것처럼 왁자지껄했다. 태형 역시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즐기고 싶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원만하게 지나가 주었으면 하고 절실히 바랐다. 그간의 고생으로 예민한 신경이 피로할 대로 피로해져 있었다.

그러나 여지없이 문제가 터졌다. 여흥에 취한 회장의 경솔한 한마디에 이제껏 참고 참아왔던 태형의 분노가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아버지는 좋았는데 아들이 그저 그랬어. 좀 더 무미건조했으면 완벽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워.’ 그 말이 멀리서도 아주 잘 들렸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한음절도 듣기 힘든 난장 속에서 보란 듯 우렁찬 성량이었다. 듣자마자 울화가 치밀었다. 언제는 감정을 실으라며! 밑도 끝도 없는 주문에 태형은 매번 닳아 헤질 만큼 자기자신을 깎아냈다. 동고동락한 동료들이라면 이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어쩌다 모욕적인 언사를 함께 들은 주위 동기들은 모두 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터질 듯한 소음 가운데 한 테이블에만 적막이 감돌았다. 섣불리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이는 없었다. 한동안 태형은 제 분을 못이겨 혼자 씩씩거리다, 물을 끼얹은듯 싸해진 분위기를 깨닫고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화를 내서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제 기분을 다스리는 일조차도.

됐어. 관두자.

찾아가 따질 기력도 없었다. 남들 앞에서 거만 떠느라 뵈는 게 없나 보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애써 웃어넘기며 주위를 독려했다. 금세 다시 술자리에 흥이 돋았다. 그러나 아무리 추슬러보려 해도 속상한 마음은 숨길 길이 없어 빈속에 술을 들이부었다.

 

자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정국이 싱글싱글 웃는 낯을 하고 다가왔다. 전혀 마시지 않은 것처럼 차림이 단정했다. 분명 궤짝으로 마시는 걸 봤는데 믿기지 않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태형은 맞은 편의 산뜻한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취한 모습이 괜히 창피했다. 술기운이 도는 불콰한 낯짝을 가리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속 발생하는 전사자들 중 하나로 보이긴 싫었다.

꽃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축하해준 건 네가 처음이다, 네 덕에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다고 전하려 했는데. 정국은 내내 회장에게 붙들려 있었다. 배알도 없는 놈. 회장 그 개자식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걸 다 받아주고 앉았어. 바보같이 착해 빠져선.

추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머리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결국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테이블에 이마를 꼬라박았다. 기름때를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피부와 닿아 있는 표면이 끈적거렸다. 잔뜩 열이 오른 정수리에 대고 정국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콧김인듯 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노골적으로 제게만 쏟아지는 시선을 알 수 있었다.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정국의 눈동자. 그게 문제였다. 그걸 보고 미치지 않을 위인이 있을까.

대뜸 시비조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왜 자꾸 쳐다봐.”

“네? 뭘요?”

“자꾸 쳐다보잖아. 얼마나 신경쓰이는지 알아?”

“그러니까 제가 뭘 쳐다보는데요?”

 

태형은 여러모로 경악했다. 첫번째, 둘이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시비를 걸고 말았다. 두번째, 혼자 내적 친분을 너무 많이 쌓았는지 생각없이 반말을 해버렸다. 김태형 예의없다. 세번째, 이봐요 전정국씨. 이제와 발뺌하다니. 맙소사.

산전수전의 명장 김태형은 전열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렸다. 정국의 입에서 나온 부정은 너무 쉬웠다. 상황파악은 금방 이루어졌다. 종이에 베어도 아픈 법이다. 유난 떠는 건 촌스러우니까. 사소한 촌극 정도로 남기면 그만이다. 태형은 싱겁게 웃었다.

됐어. 관두자.

 

“아니면 말어. 앞으로도 보지 마.”

 

더 이상 고민하는 게 귀찮아진 태형은 건성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리 썩 꺼져버리라는 투였다. 정국은 말이 없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태형은 테이블에 뺨을 대고 누운 채로 까무룩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일어나보니 어깨에 점퍼가 덮여 있었다. 왁자하던 주위가 조용했다. 매장은 텅 비어 있었고 일행들은 간 데 없었다. 황급히 일어나 짐을 챙기려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는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태형은 자연스럽게 눈알을 굴려 그를 피했다. 당황한 중에도 그와 맞닥뜨리자 불과 몇 십 분 전 그에게 했던 말들이 시끄럽게 왕왕거리며 귓가를 울려 댔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도 기껍게 봐줄까 말까 한데 이게 무슨 낭패람.

태형은 기억 속 할말 못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술김에 뱉어버린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자괴감으로 몸부림쳤다. 기억을 할 거면 실수를 하지 말든가, 실수를 할 거면 기억을 하지 말든가. 둘 중 하나여야 정국을 볼 낯이 있을 텐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태형은 우선 한강물이 차가운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혼자만의 상념에 골몰한 사이, 불시에 손목을 잡아 채였다. 끼약! 태형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놀라게 만든 주인공인 정국은 별로 개의치 않았고 적잖이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혹시 내가 보는 게 싫었어요? 말하지 그랬어요.”

“싫다곤 안 했어.”

“솔직히 형이 왜 경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알았으니까 이거 놔.”

“형도 저 봤잖아요.”

“뭐?”

“아니에요?”

 

사고가 정지했다.

 

“아님 말구요.”

 

정국은 어느새 입술이 댓발 나오고 표정이 불퉁해져 있었다.

태형은 붙잡는 손을 가볍게 뿌리쳐 떨쳐냈다. 그만큼 정국이 약하게 잡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계산대로 가니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뒤에 와서 선 정국이 여전히 앵도라진 어린애처럼 툴툴거리는 말투로 설명했다.

 

“계산 다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집에 갔어요.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형은 제가 챙긴다고 했어요. 할 말 있어서 깰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여기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이제 괜찮아. 알아서 갈게.”

 

하나도 괜찮지 않은 모습으로 괜찮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본인도 영 신뢰가 안 가는 걸 알았다.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태형의 등뒤로 정국이 가타부타 이유를 붙이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다. 부러 말리지는 않았다.

둘은 흩뿌리는 하얀 달빛 아래 능소화가 피어 있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태형은 평소와 달리 담장 너머 흐드러진 장미덩굴에 온통 이목을 빼앗겨 멍청하게 서있거나 했다. 1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 동안 에돌았다. 정처 없는 발걸음에 정국이 희미한 의심을 품을 무렵 적시에 오피스텔 건물이 나타났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정국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저 곁에 바투 설 뿐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눈치챘다.

센서등이 마치 점멸등처럼 깜박이는 현관 앞에서 태형은 비밀번호를 누르기를 망설였다. 이대로 보내면 여기서 영영 작별일 것 같은 본능적인 감각 같은 것이었다. 태형은 입속으로 ‘못먹어도 고’를 되뇌었다. 종래엔 뒤돌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자꾸 헷갈리게 해?”

 

정국이 말도 안된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전 한번도 헷갈리게 행동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태형은 짐짓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물었다.

 

“너 지금 취했지.”

“네.”

“멀쩡한 척하는 거지.”

“네. 어느 정도는요.”

“사실 제정신 아닌 거 아냐?”

“네. 근데 사리분별 다 되고 내일 아침에 기억할 자신도 있어요. 형은요?”

“나는 세련된 사람 아니야. 눈치도 더럽게 없어.”

“네. 알아요. 알 것 같아요.”

 

태형은 정국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정국의 눈은 말마따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술에 취해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광기라기엔 종류가 달랐다. 이건… 어쩌면 이미 한계치까지 끓어오른 정염에 가까웠다. 대놓고 던진 미끼를 기다렸단 듯 덥석 무는 정국에, 살짝 두려워진 태형이 뒤로 한발짝 물러서자 정국은 두 발짝 다가왔다.

 

“뭐… 구닥다리 같은 연애라도 괜찮다면 한번 해보든가.”

“좋죠. 저 취향 완전 구려요.”

“은근 상처주네. 구리다곤 안 했는데...”

“하하.”

 

너무 가깝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상체를 뒤로 빼자 정국이 손을 뻗어 허리를 끌어당겼다. 센서등이 꺼지는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아득한 어둠이었다. 모든 인내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태형은 동아리를 탈퇴했다.

 

연애는 마른 가지처럼 쉽게 부서지고 눈부시게 불타올랐다.

정국은 이제껏 여자만 사귀어 봤다고 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기대감에 부풀었던 태형은 이 연애로 인해 제가 고달파지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사랑의 시작은 그토록 찬란한지. 성애에 눈을 가린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저 저지를 수밖에는 없는 것인지. 태형은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더없이 괴롭고 다시없이 즐거운 연애였다.

 

태형은 그때까지 자신만큼 잘생긴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만큼 제멋대로인 인간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구제불능의 망나니가 태형이 두 번째로 사귄 남자친구일 줄이야. 드라마에서조차 숱하게 봐온 필부필부의 연애가 종이를 씹는 것처럼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갑자기 악기를 배우고 싶다며 드럼을 충동구매해서는 과방에 가져와 연주하지를 않나, 견딜 수 없었던 태형이 바이올린을 들고 아무렇게나 소음을 자아내자 합주를 하자며 와장창 음악대를 결성해버리고, 길을 가다 버스킹하는 사람만 보면 뛰쳐나가 마이크를 빌려 노래하는 건 예사였다. 캠핑에 취미가 들렸다더니 마녀의 독약 같은 녹색 스프를 끓여서 태형에게 먹이곤(본인은 안 먹음) 응급실에 데려가질 않나, 바다 보러 가자더니 농활을 신청해서는 뙤약볕에 분지 한 가운데서 모내기를 하고(바다 코빼기도 못봄), 지하철이나 횡단보도의 신호가 임박해 있을 때 혼자 냅다 달려서 통과하고는 승리의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러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거나 작업실에 틀어박혀 음악작업만 할 때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매일이 멀다 하고 싸웠다. 울고 소리지르고 발을 구르다 실수로 물건을 부수기 일쑤였다. 정국은 하도 이를 갈아서 씹기근이 폭풍 성장했고, 태형은 하도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서 원형탈모가 생겼다.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둘 사이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태형이 쪽팔린다고 소리를 지르면 정국은 되려 ‘나는 너 안 쪽팔리는 줄 아냐’고 악을 썼다. 토끼같이 생긴 주제에 도끼눈을 하고 ‘똥묻은 놈이 겨묻은 놈 뭐라하는 거 존나 어이없다’고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태형은 와중에 ‘왜 내가 똥묻은 놈이냐 나는 겨묻은 놈에 가깝다’고 울분에 차 정정했고 정국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시도를 반복한 정국에게는 결국 훌륭한 무언가를 완성하는 날이 왔고, 들에서 강으로 산에서 바다로 도시에서 시골을 전전하며 쏘다녔던 수많은 날들은 모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태형은 그런 것들이 불편했다.

 

“너는 나 없이도 잘 살 것 같아. 나는 너 없으면 그냥 그런데.”

“헛소리야.”

“나는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좋은 거 같애. 외로워.”

 

씨름 한판을 마치고 밤에 누워 두런두런 필로우토크를 하다 잠드는 게 낙이었던 태형은 가끔 속마음을 넌지시 꺼내 보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정국의 반응은 항상 같았다.

 

“내가 있는데 왜 외로워?”

“넌 뭐든 혼자서 다 하잖아.”

 

정국은 시무룩한 태형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괜한 소리 말라는 듯 코끝을 앙 깨물었다.

 

“이리와.”

 

그는 태형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팔에 안기면 불안과 외로움은 모두 사라지고 우주를 비추는 은하수 아래 둘만 남은 느낌이었다. 이런 간단한 신체접촉만으로 위로가 되다니 편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걸 위해 연애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자괴감이 들었다. 사람 미치게 하는 양가감정이었다.

 

“시간이 아깝잖아. 사랑만 하기에도 부족한데 왜 의심하는 거야?”

“정국아.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잖아.”

“형은 그런 게 문제야. 사랑하는데 왜 끝을 생각해?”

 

너는 그럼 끝을 생각하지 않아? 네 사랑엔 끝이 없니? 태형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만약 정국의 사랑에 끝이 없다고 한다면 태형은 심장부터 영혼까지 모두 뽑아 제단에 바칠 셈이었다.

나는 네 사랑의 일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전부를 원해.

네 전부를 주면 나도 내 전부를 줄게.

너를 위해 죽겠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태형은 문득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평소 자신의 헌신을 떠올렸고, 제 사랑이 바겐세일 중인 것 같아 서글퍼졌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전부를 내어 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현재진행형으로 태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태형은 이 연애에 미래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1

“헤어지자.”

“아 형… 왜 그래…”

 

#2

“이럴 거면 그냥 헤어져.”

“안 이럴게. 안 헤어져.”

 

#3

“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우리…”

“헤어지지 말자.”

 

매번 헤어지자고 하는 쪽은 태형이었고 붙잡는 쪽은 정국이었다. 붙잡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속이 타는 건 태형 하나인 것 같았다. 정국은 너무 가벼웠다. 경박하다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또 혼자만 포기하지.”

 

간혹 알 수 없는 말들도 했는데, 태형으로선 잠자코 헤어지기나 해줄 것이지 뜬금없는 대사나 치는게 영 탐탁치 않을 따름이었다.

 

정국의 행동들이 참기 힘들어질 때마다 태형은 늦여름의 능소화를 떠올렸다. 조용히 뒤따라오던 긴 그림자. 아늑했던 밤의 온도. 가장 연한 살을 맞대고 오랫동안 온기를 나누었던 꿈 같은 그날을 떠올리면 어쩐지 치밀어오르던 화도 가라앉는 듯 했다.

그러나 영원히 답보상태일 수는 없었다. 태형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래, 오늘처럼. 오늘에야말로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오늘처럼 말이다.

 

“야 전정국. 쩝쩝거리지 않고 먹을 수 없어?”

“잘 안되더라. 구강구조가 이상한가?”

“그냥 해달라면 좀 해주면 안돼?”

“그르지 모.”

“입안에 음식 넣고 말하지 마!”

“그게 뭐 대수라고 언성까지 높여야 해? 아, 알았어.”

 

수십 번 헤어지자고 통보했던 태형이지만 말을 꺼내는 건 늘 어려웠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태형이 지친 낯으로 중얼거렸다. 지겨워...

 

“뭐?”

“어?”

“방금 형 뭐라 그랬어?”

 

그 말이 불씨를 지필 줄은 몰랐다. 정국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태형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다 지쳐서.”

“…형.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처음엔 형이 날 사랑하는 줄 알았어. 날 사랑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잔소리하고 혼내는 줄 알았어. 형. 난 그걸 다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잘 고치지 못하는건 원래 내가 그러니까. 나란 새끼는 엄마 말도 잘 안 듣는 놈이니까. 그래도 형 말이면 열 개 중 하나 정도는 지키려고 노력했어. 왜? 사랑하니까! 내가 혼자서도 잘 놀아서 형이 더 외로운 것 같다고 하길래, 그것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어. 내가 형을 더 많이 배려했어야 했는데, 내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새끼라서, 형이 외로워하고 맨날 다른 사람만 찾는구나. 형이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거? 그건 너무 괴로웠어. 괴로워서 씨발 막 집에서 울었어. 내가 너를… 내가…

근데 형은 그게 지쳐? 내가 형이 해달라는 대로 무조건 하고 병신처럼 구르는 게 지겨워?

김태형 내가 솔직히 말해볼까?

너 그냥 사람을 쥐고 입맛대로 흔들고 싶은 거잖아.

아니야? 정말 내가 끝까지 잘못한 거야? 그래?

 

“나, 나는, 별로,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아니면 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자기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 끝내자고?”

“……”

“또?”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국아.”

“그래. 끝내.”

 

태형은 휘청이다 식탁에 주저앉았다. 예전의 정국이었다면 태형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태형의 표정을 살피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듯, 남의 일이라는 듯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정국은 팔짱을 끼고 태형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형을 아직 사랑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론 지속할 수 없어.“

“이렇게 괴로운 게 어떻게 사랑이니?”

“형은 날 믿기는 해?”

 

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었어. 형 떄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웠고. 잘 있어.

전소되어버린 사랑의 잔재를 안고 태형은 울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즐거운 연애였다.

 

 

-

 

‘너는 꼭 나무토막 같아.’

 

관계 중에 어떤 이가 태형에게 남긴 말이었다.

하고많은 것 가운데 나무토막이라니. 나름 일리가 있어서 실소가 나왔다. 굳이 종류를 나누자면 태형은 축축하게 젖은 장작이었다. 불붙지 않아 무쓸모했다. 용도를 상실한 존재였다.

 

초여름의 비를 뚫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 평일 낮의 카페엔 직원 하나와 손님 한 명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날 카페 안 단 하나의 손님이 제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문 앞에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터는 태형에게 직원이 호텔 이름이 적힌 커다란 타올을 가져다주었다. 감색 외투에 점점이 물기가 맺혔다.

 

그는 젖은 장작처럼 서있는 태형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정국입니다.”

 

태형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상하게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잔디를 심던 초가을이었나.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초여름 어느 날이었나. 사랑이 사랑만으로 완벽하기를 바랐던 날들이 있었다.

 

정국은 처음부터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그는 네덜란드의 가구 디자이너였는데, 영어를 아주 잘했다. 라스트 네임을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우스워보여서, 라고 했다. 열 살 이전에는 더블린에서 자랐고 이후에는 헤이그에서 자랐다는 그의 말에서 독특한 억양이 읽혔다.

정국에게는 재미난 일화가 넘쳐났다. 겨울이면 꽁꽁 언 도시의 운하에서 아버지와 숭어 낚시를 하던 이야기와 온천욕을 하기 위해 핀란드에 갔다가 곰을 만나 조난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 덴마크의 진짜 해적과 조우한 이야기 등 흥미로운 모험담이 쏟아졌다. 태형은 업무 얘기를 꺼내는 것도 잊고 그의 말주변에 빠져들었다. 반짝이는 눈을 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에게서 오로라 빛깔의 독특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한참 혼자 떠들어대던 정국은 오래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서서히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딱지가 내려앉은 태형의 입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일주일쯤 되었나요?”

 

너무 놀라면 오히려 침착해진다는 걸 그날 알았다. 태형은 일주일 전 뺨을 얻어맞고 동거인의 집에서 쫓겨난 참이었다. 실로 지옥 같은 일주일이었다. 새로 집을 구하고, 집을 구하기 전까지 회사에서 숙식하고, 피로한 몸을 이끌고 다시 외근을 다니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줄 착각했다.

 

“저라면 주머니 속 병아리처럼 소중히 아껴줄텐데.”

 

태형은 조금씩 제 안의 물기가 말라가고 슬픔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장작에 불이 붙듯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을 느꼈다. 경험해본 것 중 가장 고요하고 거센 불길이었다.

어느 로맨스 영화라면 첫눈에 마음이 맞은 젊은이 둘이 바로 위층 호텔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국은 태형이 심심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을 건넸고 둘은 신변잡기만을 떠들다가 다음 미팅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번엔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태형의 예감은 잘 맞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결국 정국과 일적인 만남 외에도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태형은 서울이 처음인 정국을 위해 명소 관광을 하거나 눈여겨보았던 전시를 관람하러 가거나 강변에 앉아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다 맥주를 마시거나 하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경험들을 공유했다. 어린애들 연애처럼 즐거웠다. 모든 게 새로웠다.

 

태형이 정국을 새 집에 초대한 것은 수순처럼 자연스러웠다.

결전의 날 태형은 현관에 한발 들여놓은 정국을 가로막고 제가 원래 이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네가 특별한 거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자, 정국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밖에서 간단히 먹고 들어왔기에 거창한 상차림은 필요 없었다. 태형은 아끼던 와인 한 병과 글라스를 내었다.

향기로운 와인을 몇 잔 마시고, 적당한 취기에 마음이 들뜬 태형이 정국에게 가족 이야기를 해달라며 졸랐다. 숭어낚시 이후로는 한 번도 얘기해준 적이 없다면서. 정국은 어색하게 웃더니,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맴도는 입매를 하고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정국은 어릴 때 입양되어 아일랜드인 어머니와 한국계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랐다고 했다. 위탁가정에는 두 번 맡겨졌는데, 끝이 좋지 않아 그들과는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지금은 네덜란드 국적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 있는 컴퍼니와 계약을 맺으면서 앞으로 10년 정도는 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지낼 계획이었다.

이야기를 하며 정국은 왼쪽 손목에 걸친 시계를 보았다. 한눈에도 값이 꽤 나가 보이는 명품시계였다. 태형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그때였다. 시계가 팔꿈치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손목의 흉터가 드러난 것은. 태형의 몸이 크게 떨렸다. 정국이 돌아보았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지금부터야.

태형은 비장한 얼굴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으면 너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정국은 자신을 해하였던 당시 지난 사랑의 흔적이 깊어 사라지고 싶은 감정을 극복하기 어려웠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없이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고. 지금도 여전히 그를 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외람되지만 태형을 만나며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고. 염치없지만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겠냐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게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었다.

태형은 정국에게 느꼈던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동질감이었다.

 

“지금은 그, 죽고 싶은 마음을 극복하셨나요.”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견디는 거죠. 죽을 때까지 견디면서 사는 거예요.”

 

태형은 오래 울었다. 또다시 답없는 사랑에 빠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그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태형을 위해 겉옷을 벗어주고 온몸으로 끌어안아 자신의 체온으로 데우는 사람이었다. 제가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형은 제 안의 물기가 정국을 더욱 못 쓰게 만들까봐 두려웠다. 그래도 행복했다. 계속되길 바랐다.

태형에게 이 사랑은 말줄임표 같았다. 그를 이해하기 위한 단 하나의 낱말도 필요치 않았다. 그는 남겨진 그루터기 같은 사람이었는데 누가 그의 둥치를 베어 넘겼는지 태형은 알고 싶지 않았다. 죽는 날을 기다리는 나무의 곁에 앉아 오래도록 그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정국은 그 뒤로도 약속한 10년 중 절반을 한국에서 지냈다.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에는 전혀 발도 들이지 않았다. 잊기 위한 발버둥인지 눈먼 사랑 때문인지 태형이 농담조로 물을 때면 정국은 금세 죽을듯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왼 손목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자주 포크를 떨어트리면서 죄인 같은 얼굴을 했다. 정국이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태형의 고통은 실체화되었다. 작은 칼날로 심장을 찔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웃었다. 둘의 살림을 합치는 날, 훌쩍거림으로 예열을 하다 종국엔 엉엉 울어버린 정국을 달래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며칠 분위기가 이상하던 정국이 심각한 목소리로 그렇게 전했을 때 태형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방금 완성한 미네스트로네를 국자 가득 퍼올리며 태형은 자신의 음성이 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본국으로 돌아가.”

 

정국에게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어린 정국을 거두어 먹이고 사랑으로 키운 가족이 있었다. 볼품없는 말라깽이에 불과했던 동양인을 아끼고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계약관계로 묶인 의뢰인과 고객이 아닌 신뢰로 똘똘 뭉친 동료들이 있었다. 과거의 연인보다도, 현재의 연인보다도, 훨씬 소중한 사람들이 정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삶의 뿌리. 기반. 터전. 이 모든 것을 어느 이국의 땅 위에서 영(0)에서부터 만들어갈 수는 없었다. 태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서는 안되었다.

 

“태형.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헤어지자. 남을 위한 나는 이제 지긋지긋해.”

“네가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그래서, 또 죽고 싶어?”

“아니야… 아니야 태형…”

 

가차없는 말에 정국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망연자실하게 눈물을 흘렸다. 또다시 가슴 속 작은 칼날이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

5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떠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언젠가 정국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순간 태형은 그를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결코 포기하고 싶지도, 포기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형은 너무 많이 사랑했고 너무 많이 버려졌다. 그래서 정국을 놓지 못했다. 허나 더 이상은 한계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정국에게 이래서는 안될 짓이었다.

정국은 여전히 숨이 넘어가게 울고 있었다.

 

“돌아가더라도 절대 포기하지마. 앞으로도 계속 네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말해줘. 그것만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 너를 사랑하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줘.”

“사랑해. 태형. 사랑해…”

“나도 마찬가지야. 나를… 행복하게 해줄거지?”

 

둘의 얼굴은 어느새 비맞은 사람처럼 죄 젖어 있었다. 태형은 정국이 제대로 대답해줄 때까지 집착적으로 물었고, 이에 못이긴 정국은 마지못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억지로 하게 된 이 약속으로 인해 그들이 평생을 슬퍼하게 되리란 걸.

 

돌아올게. 마지막 순간에 정국은 다짐하듯 말했다. 태형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태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륙 직전, 비행기 꽁무니의 적색 섬광등이 번쩍 빛났다.

 

너를 잊지 못하겠지. 네가 덮어주었던 옷가지를. 너와 함께 보냈던 풍경을. 네 눈물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토록 간절하던 사랑이 마지막에 이르러 소멸되는 과정을 견뎌낼 힘이 태형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태형은 이제 제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돌이킬 수도 없이 텅 비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길고 둔중한 아픔이 지속되었다.

 

-

 

이듬해 태형은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여전히 9월 1일이면 파이를 굽고, 젖은 장작을 말리듯 햇볕에 누워 몸을 뒤집지만. 어떤 만남이든 포기할 각오도, 포기하지 않을 각오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태형은

차분히 숨을 가다듬고 가름끈을 펼쳐 삶의 다음 장을 읽어보는 것이었다.

 

 

 

 

 

 

 

 

 

* 이별, 윌리엄 스탠리 머윈